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한울교회 부목사)

서론

본고는 펜 앤 마이크에 출연한 정일권 박사의 강연을 보고 기고한 글이다. 정일권 박사는 강연을 통해 페미니즘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잘 드러내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했는데,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사상적 전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바라보면, 페미니즘의 극단적인 결과들이 개인의 일탈 또는 유럽 지역의 국지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한 연유로 먼저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전제를 설명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러한 차원에서 본고는 페미니즘에 뿌리 깊이 박힌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 설명 하고자 한다. 이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관련 현상들이 결코 국지적이거나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1. 이성의 권력 거부

Phalleo-centrism은 페미니즘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이다. 한글로는 “남근중심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데카르트적 사고 방식을 공격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은 언제나 자아의 이성을 중심축에 놓고서 타자를 인식하고 분석한다. 따라서 타자는 자아의 관점에 비추어진 모습일 뿐, 타자의 존재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이처럼 데카르트적 인식론은 언제나 타자를 자아의 관점에 따라 왜곡 또는 변형, 축소 및 은폐 시켜왔다고 주장한다. 자아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타자의 모습들을 삭제 및 은폐 해왔고, 자아의 관점에서 불가해한 부분들을 그릇된 것 또는 기형적인 것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의 독특성을 말살하는데 기여해온 담론이라고 비판한다. 타자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대신에, 자아의 관점에 부합하는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서 타자를 왜곡 또는 변형, 축소 시켜왔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러한 인식론은 서구 제국들이 3세계의 존재들을 마주할 때, 서구 제국의 법과 제도의 관점에서 3세계를 길들이는데 부역했다고 꼬집어 낸다. 3세계의 존재들의 이질적인 전통과 관습을 기형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그러한 타자의 모습들을 억압하는 담론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의 타자는 자아와의 차이 또는 일탈로 인식된다. 환언하면, 타자는 있는 그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대신에 자아를 기준으로 타자가 나와 어떻게 다른 존재인지 바라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을 비판함에 있어서 차이와 일탈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여태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타자는 내가 바라보는 대로 바라보며,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정의할 뿐, 타자 존재 자체에 접근해 본적 없다. 우리가 타자에 대해서 만들어 내는 담론은 타자의 있는 모습 그대로에 가해지는 “인식론적 폭력”이다. 

Feminist Movement (사진=thoughtco.com)
Feminist Movement (사진=thoughtco.com)

따라서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타자에 대한 모든 종류의 담론은 자아의 관점이 가득 투영된 파편적이고 그릇된 묘사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의미 있는 담론을 생성할 수 없다. 대신에 타자에 대하여 침묵해야 한다. 어쩌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타자를 가장 덜 왜곡하고 억압하는 방법일 테니까.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모든 인식과 담론에 대한 회의를 표출한다. 즉, 타자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접근을 거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성의 권력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이성은 자기 중심적이고, 뒤틀리고 왜곡된 거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성에게 몰락을 고한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접근을 거부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청이다. 타자가 자신을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침묵 가운데 타자가 자신에 대해서 들려주는 대로 듣는 것이다. 경청의 인식론은 단어 자체의 어감은 아름다우나, 실제 의도는 타자가 말하는 자신에 대한 담론에 감히 도전하거나 반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외부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담론은 왜곡 투성이므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아 중심적 관점이므로. 따라서 제 3자의 객관적인 시각은 그것이 과학이든지 심리학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의 반 학문적 태도는 이러한 전제에 기인한다. 

페미니즘은 서구를 지배한 데카르트적 사고 방식이 남성이 여성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언제나 사고의 중심축에 남성이 존재하고, 여성은 중심축인 남성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따라서 남성이 중심축에 있는 남근중심주의 인식론은 여성 그 자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한 적 없다. 언제나 여성은 남성과 어떻게 다른지 묘사 되어 왔을 뿐, 여성 자체에 대한 묘사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남성의 일방적인 관점에서 왜곡된 채 형성되어 왔다고 소리 높인다. 나아가서 여태까지 형성된 여성에 대한 담론은 남성의 관점에 부합하도록 길들여진 이미지라고 강변한다. 따라서 여성을 억압하는 담론으로 부역했을 뿐이라는 주장에 이른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나아간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남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묘사하는 담론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이 스스로 형성한 여성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 도전해서는 안된다. 모든 종류의 이성적, 지성적인 논박과 토론의 여지를 닫아 버린 채, 일방적인 주장에 굴복하라는 말과 다름 없다. 여성이 무슨 주장을 하든지, 그것이 아무리 불합리하고 폭력적이든지 토 달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로 맨스플레인(mansplain), 설명하려는 남성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행동 양태는 이성의 권력을 해체하고 몰락을 고하는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미국에 아직 노예 제도가 존재할 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여성 노예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자녀, 특히 영아들을 살해했다. 이는 사회 심리학이나 행동학적으로 볼 때, 억압과 착취에 의해서 발발한 집단 히스테리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히스테리적 폭력성은 이해할만한 여지가 있으나, 그들이 약자에게 가한 폭력은 윤리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오직 흑인 노예 여성들의 관점에 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들의 어린 자녀를 집단적으로 살해한 것은 흑인 여성의 재산권 주장이다. 자신들이 자녀를 낳으면 자동적으로 백인 남성 주인의 재산으로 귀속되기에, 자신들의 어린 자녀를 끔찍하게 살해함으로써, 백인 남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이다. “이 자녀는 나의 소유다! 너에게 결코 넘겨주지 않겠다!” 즉,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주체적인 행위라고 해석한다. 나아가서 경제적 사회적 레지스탕스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윤리와 상식에 반하는 방식으로 끔찍한 범죄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윤리적인 비판을 가하거나, 지성적, 이성적인 접근으로 그녀들의 행위를 분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남근 중심주의의 파편적이고 그릇된 담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어린 아이를 죽인 이들의 담론을 경청하는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보편적 윤리와 상식을 포기하도록 요구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당함에 대한 침묵을 강요 받게 될 것이다 (2편에서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