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8

평생목회를 통틀어 부교역자로 봉사했던 것은 부산의 부민교회와 동원교회가 전부이다. 부민교회는 신대원을 갓 졸업하고 강도사 시절을 부교역자로 섬겼고 동원교회는 부목사로 섬겼다.

연산로터리 부근에서 그래도 큰 교회로 자리 잡은 동원교회는 지금은 고신에 이름이 없다. 그러나 동원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동원교회는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바람에 긴축재정을 하여 생활비가 전교회보다 현저히 적었다. 아내는 지금도 바듯한데 적은 생활비로 어찌 사냐고 걱정했지만, 우리가 언제 풍족한 생활비를 정해 놓고 받은 적이 있느냐, 교회가 적게 주면 부족한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다. 일용할 양식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나의 말에 두 번 다시 토를 달지 않았다.

온유한교회 설립예배 순서를 맡은 노회 목사님들
온유한교회 설립예배 순서를 맡은 노회 목사님들

 

전도특공대

전도특공대를 조직했다. 열심 있는 두 집사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한 집사는 전도지를 만들어 봉사했고 또 한 집사는 몸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나는 부민교회에서 전도왕인 권사님의 무대포적 전도를 적용하기를 가르쳤다. 전도는 신사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무대포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박 집사(후일 권사임직)는 그런 무대포적인 기질이 있었다. 아무에게나 막 들이대는 성격이었다. 그가 일 년에 전도하여 등록시킨 사람이 3~40명 정도였다. 나중에는 한주에 한 명은 등록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전도했다.

등록시킨 새신자가 이사를 가기 전에는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한 달이면 4~5명 정도 새신자가 등록하면 그들을 한곳에 모으고 나를 불러다가 새신자 교육을 따로 시키는 것이다. 나의 새신자교육 프로그램은 12주였기에 3개월을 붙잡혀 교육받고 교회에 출석하면 거의 신자가 되었다.

그런 전도왕도 때론 위기를 맞을 때가 있다.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전도하다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교회를 나오겠다고 할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어느 주일인가 전도한 사람을 교회로 모시고 오기 위해 집에 찾아갔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나오지를 않더란다. 그래서 그만 안방으로 쳐들어가서 강제로 옷을 입히고 가자 하니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박 집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가 이제는 갔겠지, 하고 안심하고 나오는 사람을 낚아채서 교회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전도는 그렇게 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14: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한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설립예배를 드리고 있다.
설립예배를 드리고 있다.

 

스스로 무산시킨 청빙

동원교회에서 부목사 2년이 지났을까 드디어 나에게도 청빙이라는 손짓이 왔다. 포도원교회에서였다. 그 교회 장로들이 은밀히 동원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듣고 합격점을 주었다고 전해 들었다. 나를 아끼던 동원교회 구연수 장로님은 이제 거의 다 되었으니 목사님은 한 주간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말대로 무척산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하나님은 그동안 내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포도원교회는 다음 주에 공동의회를 하려고 광고를 한 뒤 교인들의 요구에 따라 수요기도회에서 나를 소개하려고 월요일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뿔싸 어느 기도원에 간다고 말을 하지 않아 아무도 나의 행방을 모르자 포도원교회 당회는 당황해서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자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부산북교회에 부목사로 있던 부목사를 불러 설교를 시켰고 다음 주일에는 그 부목사를 두고 청빙투표를 하여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청빙을 무산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출석하지 않으셔도 멀리 마산에서 설립예배에 참석하신 아버지(작고)와 동생(천헌주 장로)
교회는 출석하지 않으셔도 멀리 마산에서 설립예배에 참석하신 아버지(작고)와 동생(천헌주 장로)

 

뜻밖에 온 전화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군대 시절 우리 부대 군종병으로 있었던 감리교 이억집 목사였다. 인천에서 개척을 하고 있던 그는 휴가를 얻어 기도원으로 갈까 하고 집을 나서면서 기도원에서 읽을 책을 한 권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점에 들렀는데 마침 전국 교회 주소록이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내 이름이 있어 확인차 전화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확인한 그는 기도원으로 가던 걸음을 돌이켜 그 길로 부산으로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하는 말이 자기 교회 이웃에 주공에서 7천 세대 아파트를 지었는데 이제 입주를 시작하니 와서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또 안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는 안 해도 좋으니 자기 사는데도 보고 한 번 와서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휴가를 얻어 이상하게도 그가 사는 인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과연 7천 세대 아파트는 입주로 분주했다. 그런데 아파트 상가들은 이미 교회 간판을 달고 있어서 들어갈 틈이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분양가가 비싸서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딱 한 군데 교회가 없는 빌딩이 있었다. 아파트 정문 길 건너편이었다. 그 좌우로 건물들에는 교회 간판이 붙었는데 유독 그 건물만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 건물에 있는 부동산을 찾아가 빈 공간이 없냐고 물었다. 지하가 비었다는 것이다. 세를 얻을 수 있냐고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업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교회라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투로 건물주가 교회라면 딱 질색하더라. 나도 장로인데 우리도 개척하려고 수차례 이야기 해봤지만 거절당해 옆 건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교회를 거절하는가? 만나보아야 했다.

그렇게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내가 내 코가 꿰는 시작이 되었다. 주인은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하더니 사실 내 친구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는데, 목사님 같으면 왠지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쇠뿔도 단번 빼라고 했듯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가계약을 해 버리고 말았다.

후일 알았지만, 그 이웃에 제법 큰 감리교회가 건축을 하려고 당분간 예배 장소를 찾다가 친구인 이곳 건물주에게 건축할 동안만 좀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목사님은 무슨 백으로 얻었냐고 물어서 저는 순전히 하나님 빽 밖엔 없다고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인천에 개척을 시작하도록 이끈 하나님의 강하신 손길이었다. 그러나 월세는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보증금을 걸 돈이 없었다. 나는 이 개척을 피하여 보려고 잔꾀를 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던 완고한 시골 교장인 아버지께 부탁했다. 사실 안 되기를 바라면서 부탁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개척을 하지 않을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순순히 당신의 집을 담보로 새마을금고에서 돈을 빌려 보증금을 보내 주셨다.

이제는 꼼짝없이 개척을 해야만 했다.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러나 동원교회가 후원금을 약속해 주었고 포도원교회 당회도 내게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청빙이 무산되어서 개척을 가나보다 하고 자비를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개척교회지만 아파트에서 큰길을 건너 지하교회로 사람들이 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편리한 것을 좋아하기에 교회까지 불편하게 다닐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안에 두 곳의 상가에도 각각 1개씩 2개의 교회가 있었으니 길 건너 지하교회로 나온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회설립예배에 참석한 신대원 35회 동기들
교회설립예배에 참석한 신대원 35회 동기들

 

교회 이름이 노회에서 문제가 되다.

당시 한강 이남과 인천, 경기도 지방이 경기노회에 속하였기에 교회 설립보고를 경기노회에 해야 했다. 서기가 교회설립보고를 하니 갑론을박이 일었다. 왜 교회 이름이 온유한교회이냐는 것이다. 당시 이상한 이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때였기에 더욱 그랬다. ‘시냇물흐르는교회, 하나님의능력을제한하지않는교회 등등 교회 이름이 기존 교회들이 가진 지역 이름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는 개척교회의 전성시대의 도래를 뜻하기도 했다.

노회의 어른인 박종수 목사님이 발언대에 섰다. 모두가 집중하였다. 박 목사님의 한마디가 촌철살인과 같았기 때문이고 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 이름을 너무 생각 없이 짓는 바람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아니 어느 교회는 온유하지 못해서 온유한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느냐?” 노회 분위기가 싸해졌다. 위기였다.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큰 벽에 부딪힌 것이다. 나는 손을 들고 나갔다. “저도 지역 이름으로 교회명을 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열고 이름을 지으려고 보니 만수교회, 만수동교회, 만주중앙교회, 만수제일교회, 만수장로교회, 만수감리교회, 만수성결교회, 만수순복음교회 등등 만수라는 이름의 교회가 만수판입니다. 사실 만수라는 동 이름도 옆에 장수동이라는 이름을 의식하여 지은 이름인데, 너희는 장수하냐 우리는 만수한다고 해서 지은 것으로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저는 성경적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어 그랬습니다.”

박 목사님이 재차 손을 들고 발언대로 나오셨다. 모든 노회원이 이제 너는 죽었다는 눈초리로 측은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정말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아 내가 생각 없이 너무 급하게 말했나 봅니다. 나의 발언을 취소하고 천 목사님께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노회원들이 깜짝 놀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 한 마디로 모든 논쟁은 종식되었다. 어른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준비하여 보낸 1 가정

지금까지 그랬지만 아내와 단둘이 앉아 예배를 시작한 개척교회는 몇 주일을 그렇게 보내다가 드디어 한 가정이 찾아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양 집사 가정이었다. 그는 서울의 모교회의 교인이었는데, 장로이신 아버지가 아들 가정이 만수동 주공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하니 그러면 온유한교회에 등록을 하고 목사님을 도우라 하는 특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자세히 그 사유를 물으니 아버지 장로님이 인도하는 구역에 반 집사라는 열심 있는 교인이 있었는데 그는 무슨 말을 내놓을 때마다 우리 천 전도사님은 이랬다.”는 식으로 말하여 나에 대해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고신에 천 목사는 몇 사람 없었기에 금방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 반 집사(후일 권사임직)는 거제 문동교회에 당시 고등학생 신자였다. 그렇게 등록한 그 양 집사 내외는 내가 온유한교회를 떠날 때까지 근 7년을 재정을 맡아 수고하는 신실한 핵심 맴버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정이 길 건너 지하교회로 찾아왔다.(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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