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5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신학대학 3학년이 되었다. 그동안에 나는 결혼을 하였다. 문동교회와 삼거리교회는 1학년 때 7월에 부임하였고 이듬해 1월에 결혼을 했는데, 교인들이 추수감사 십일조를 함으로 양식이 생겼고 거제여전도회연합회도 단단히 후원을 함으로 용기를 냈던 것이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기숙사 한 방에 살게 된 당시 신대원생인 강영순 전도사를 만났다. 대구경북지역 SFC 간사로 있던 친구였다.

봄 학기가 끝나고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 기숙사에서 나를 만난 그 친구가 나더러 합천에 개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못 한다고 했다. 해야 한다. 못한다. 하다가 그럼 구경이나 한 번 해보지 않겠냐 해서 그러자고 했다. 구경하고 난 후에 안 하겠다고 하면 자신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기에 그 정도는 들어줘야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강 전도사가 그처럼 목을 매는 이유가 있었다. 작년 여름 대구경북지역 SFC대학생들이 이곳에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그것을 계기로 이곳 청년들과 자매결연을 맺고는 1:1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전도가 이루어졌고 교회만 있으면 다니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까지 기차로 올라가서 오토바이를 타고 합천까지 갔다. 합천읍 장계리와 인곡리의 두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꼭 교회를 세워야 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존재가 희미해진 새일교회라는 이단이 있었는데 그 새일교회 여전도사라는 사람이 와서 청년들을 포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들은 이단이 뭔지 몰랐기에 교회라고 하니까 그냥 여전도사에게 포섭이 되었다.

우리 둘은 그 여전도사를 만나 새일교회가 왜 잘못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이곳을 떠나기를 종용하였다. 그런데 그 여전도사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순간 의분이 폭발한 내가 당신 꼼짝 말고 있으라. 내가 내려가서 주일 지낸 후 바로 짐 싸 들고 올라와서 당신의 정체를 폭로할 것이다. 어디 거짓말로 순수한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가려 하느냐면서 큰소리를 쳐버리고 말았다. 전혀 올 생각이 없었고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 왔던 곳이었는데, 성령께서는 나를 그렇게 거기다 옳아 매어버렸다.

토요일에 교회로 돌아가서 이미 여러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주일학생들이 교회로 몰려와 울기 시작했다. 주일 저녁에도 나의 사임을 만류하기 위해 교인들은 눈물 작전으로 나는 설득하려 했다. 나는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두고 가자니 이들이 눈에 밟히고 그렇다고 안가면 합천의 그 영혼들은 이단으로 넘어갈 것 같고.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이삿짐을 쌌다. 차를 불러서 짐을 싣고 무조건 합천을 향해 떠났다. 그때는 결혼하여 장남이 백일을 앞두고 있던 때였고 짐이라야 이불과 옷 보따리 몇 개, 주방용품 몇 개 정도였다.

대구경북 sfc 운동원들이 다시 봉사활동을 왔을 때, 오른쪽 아래 방이 박선생의 아래채로 사택으로 쓰고 있었다.
대구경북 sfc 운동원들이 다시 봉사활동을 왔을 때, 오른쪽 아래 방이 박선생의 아래채로 사택으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합천에는 우리가 들어가 살 집도 생활비도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그냥 내가 가자는 데로 갈 뿐이었고 아내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야말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주의 손에 맡긴 바 되고 하나님이 어찌하나 기대하면서 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가 있는 장계리 마을에 도착하였다. 기사는 내게 어느 집입니까?” 물었다. 나는 저기 학교 운동장에다 짐을 풀어주세요.” 기사는 말없이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다 이삿짐을 풀어주고는 돌아가 버렸다.

나와 아들을 품에 안은 아내는 이삿짐 옆에 서 있었다. 주께서 인도하시리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때 동네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자기 논에 가던 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박 선생으로 불렸는데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명예퇴직한 분이었다.

운동장에 짐이 있는 것과 젊은 청년 부부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 쪽으로 오더니 이 학교에 전근 왔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했더니 그럼 어찌 왔냐고 물었다. 이 동네에 살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더니 어디에 살 것이냐? 살집이 있느냐? 고 물었다. 나의 없다는 대답에 어리둥절하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마침 우리 집 아래채가 비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어떤 여전도사가 살았는데 자고 나니 도망치듯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거기라도 좋으면 사십시오.”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렇게 준비해 두고 계셨다. 그 새일교회 여전도사는 내 말에 겁을 먹고는 내가 오기도 전에 황급히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 새로 도배를 한 집에 우리가 살게 되었으니 우리의 거처를 그가 미리 준비해 준 셈이 되었다. 리어카를 빌려 짐을 옮기므로 합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화요일에 짐을 정리하고 동네를 대충 돌아보았다. 그런데 동네 어귀에 참 좋은 장소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교실 한 칸의 건물이었다. 박 선생에게 물으니 옛날에 초등학교가 있던 장소라는 것이다. 학교가 동네에서 한참 아래쪽으로 장소를 옮긴 후 옛날 학교의 목조 건물은 헐렸지만, 벽돌로 지은 교실 하나만 남았다는 것이다. 교육청도 동네도 그 아무도 돌보지 않아 유리창도 없었고 출입문도 없었다. 먼지만 수북할 뿐이었다.

수요일 대충 청소하고 호롱불을 밝히고 소수가 모여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갈 즈음에 갑자기 한 취객이 들이닥치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러느냐? 내가 내일 교육청에 고발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큰일이나 저지른 것처럼 그 사람 앞에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탁자 하나 놓고 설교를 시작했다. 창문도 문도 달지 못한채 호롱불 켜고 예배를 드렸다.
탁자 하나 놓고 설교를 시작했다. 창문도 문도 달지 못한채 호롱불 켜고 예배를 드렸다.

 

폐교실이 예배당이 되다

다음날 인사를 하려고 초등학교에 내려갔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마침 방학이라 당직 선생님만 남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바둑을 두는 사람이 어제저녁에 호통을 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분 옆에 앉아 불리할 때마다 그분에게 훈수를 들어, 이기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나더러 바둑을 두느냐고 물었다. 조금 밖에 모른다고 했더니 한 번 두자는 것이다. 흑을 잡고 두었다. 내가 이겼다. 두 번을 지더니 백을 내게 주었다. 그래도 이기니까 그분이 정중하게 무릎을 모으더니 어제저녁에는 큰 실례를 했습니다.”하고 정식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를 살짝 불러 이렇게 말했다. “교육청에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교육청에 갔다. 이러저러해서 폐교실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면 차라리 불하를 받으라고 한다. 매매로 폐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데, 살 사람은 없고 동네서는 마을회관으로 쓰겠다고 마을에 기증하라고 하는 참이라는 것이다. 불하를 받겠다고 하니 그러면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교육청은 공고를 일주일간 하였고 나는 일주일 후에 입찰하여 불하를 받았다. 입찰가는 153,000원이었다. 당시 한 달 치의 생활비가 2만 원 정도였으니 근 일 년 치의 생활비였다.

대국 경북지역의 대학생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여 2천 원, 3천 원, 푼푼이 모아 헌금을 하였고 인근 교회들이 헌금을 해주었다. 드디어 폐교실은 완전히 교회당이 되었다. 탁자 하나 놓고 설교를 시작했다. 교회명도 장인제일교회라 지었다. 장계리의 장과 인곡리의 인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택은 없었다. 밤이면 쥐가 운동장처럼 달리는 박 선생의 사랑채에 살아야 했다.

 

장기려 박사를 만나다

2학기가 되어 학교에 갔더니 누군가가 나에게 장기려 박사(당시 복음병원장)를 만나보라고 말했다. 용기를 내어 장 박사님을 만나 처지를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자신의 월급의 반을 내 손에 쥐여 주면서 사택을 만들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합천은 산이 마사 토여서 강변은 모래가 많았다. 시멘트를 사다가 벽돌을 찍었다. 그리고 폐교실 뒤편에 달아서 사택을 짓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노동이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게 생긴 청년이 들어와 폐교실을 교회당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손수 집을 짓는다? 그때 나이 27세였으니 어른들 보기에 어린아이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오며 가며 그 동네에서 화제가 되었다.

벽돌을 어느 정도 쌓아 집의 형태가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걱정이 생겼다. 쌓기는 했지만, 지붕을 덮고 미장을 해야 하는 것이 숙제였다. 거기 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지나가면서 관심을 가지더니 마무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은 이것조차도 처음이라면서 그다음은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가 마무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아주 실비로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주일학생이 되었다. 이웃 교회에서 얻은 포탄피가 교회 종이 되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주일학생이 되었다. 이웃 교회에서 얻은 포탄피가 교회 종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나의 부탁으로 부엌을 반으로 나눠 간이 목욕탕을 만든 것이었다. 시장에서 큰 가마솥을 사다가 걸고 벽돌로 쌓아 탕을 만들었다. 불을 때 물을 덥히면 협소하지만, 목욕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든지 목욕을 하도록 동네에 개방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석이조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목욕하려고 읍내까지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나가서 목욕해야 했기에 일 년에 두 번 정도가 목욕의 전부였다. 이제는 언제든지 물을 길어다 붓고 불만 때면 되기에 그 편리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대신 우리는 목욕하는 분들이 때는 불기운이 안방을 돌아나가도록 되어 있어서 방이 따뜻해서 좋았다.

추수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교인이 청년들뿐이니 추수를 상징하는 곡물이 없는 맹숭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네에서 추수하였다고 고구마며 여러 곡물들을 조금씩 가지고 와서 그해 가을은 참으로 풍성한 추수감사절이 되었다.

장 박사님은 그다음 해 여름 방학에 복음병원 의료봉사대를 인솔하여 이 동네를 찾아 주셨다. 학교 교실을 진료실로 꾸미고 동네 사람들에게 의료봉사를 하시면서 전도를 하셨다. 주께서는 그렇게 교회를 세워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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