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3

다음주일이었다. 예배를 인도하던 나는 느닷없이 교회당을 새로 짖자고 외치고 말았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첫째, 우리의 마음은 전부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심이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

둘째, 지붕을 건드리면 다 썩고 허물거리는 기둥은 어찌 하겠는가? 결국은 새로 지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말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짓는 것이 돈을 아끼는 길이다.

셋째, 비용은 지금 있는 것으로도 할 수 있다. 우리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고 지붕만 하면 된다.

넷째, 우리 박 선생님이 전적으로 헌신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할 수 있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집을 새로 짓는 것을 기뻐하셔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날의 설교의 전부였다. 예배를 마쳤는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기뻐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렇게 수용하고 따르고 것이었다.

기적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기적의 첫 번째는, 그 무렵 우리 부대에 군종병이 전입을 왔다는 것이다. 그는 대전 감신을 졸업하고 제대하면 바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전도사였다. 그는 일병이었지만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고 이미 가정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그를 전도사님이라고 예우하게 되었다. 그는 일병이지만 우리는 하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목자가 되었고 나는 그에게 강단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교회당 건축을 적극적으로 맡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건축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강원도가 감리교 우세 지역임을 잘 활용하여 많은 헌금을 얻어오는 전령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보내 주신 사자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 일어난 기적은 교회당 부지로 넓은 땅을 얻은 것이었다. 물론 지금 있는 부지와 바꾼 것이었다. 교회당을 새로 짓는다는 소문이 나가자 동네 한 분이 재빠르게 제의를 해왔다. 지금의 교회당 부지는 너무 좁고 집 한 채도 겨우 앉힐까 말까 하니 자기의 텃밭과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의 교회당이 동네 입구이고 가게를 차리면 할 만한 곳이니 그 나름대로 계산을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텃밭은 오히려 동네 안으로 조금 들어간 곳이며 지금의 면적보다 열 배나 넓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호박이 덩굴 채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배당 장소를 그렇게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세 번째로 일어난 기적은 그 동네 새마을 이장이 시멘트를 헌물한 것이었다. 동네 입구에 다 쓰러져 가는 교회당이 새마을 운동을 하는데 제일 눈에 거슬렸다는데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니 이왕에 지을 바에야 흙벽돌로 짓지 말고 시멘트로 벽돌을 만들어 지어라는 것이었다.

네 번째의 기적은 목수 박선생의 헌신의 약속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으로 속죄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할렐루야!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이제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6월 하순 우리는 중대장에게 대민 봉사 기간을 이틀만 달라고 청원하였다. 중대장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순순히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이틀간 대민 봉사를 할 수 있는 요원은 4명으로 한정해 주셨다. 한 과에서 한 명만 가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군수과에서는 내가, 인사과에서는 서 병장이, 정보과에서는 박 상병이, 그리고 군종 병으로 이 전도사님 일병이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시멘트를 강바닥으로 나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박 선생이 만들어 가지고 온 벽돌 틀을 놓고 열심히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멍이 없는 직사각형의 틀에다 밑 바침도 없는 터이라 작업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몇 번을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작업 인원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우리 네 사람하고 박 선생 내외분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강에는 모래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참을 주는 이도 없었지만 우리는 참 먹을 시간도 없이 강행군하였다. 우리가 아니면 만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박 선생님과 그 부인은 집에 짐승도 아이들도 있고 해서 다 저녁 때 들어가셨다. 우리도 귀대하고 싶었지만 한 장만 더, 한 장만 더 하면서 시멘트 말아놓은 것만 치우고 가자하면서 욕심을 내다보니 그만 저녁 식사시간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박 선생님의 집으로 몰려갔다.

대한기독교감리회 광정교회당 입당예배 기념 사진 맨 좌측에 서 있는 분이 박 선생이다. 완공은 안 됐지만 우리들 전역일이 가까워서 서둘러 입당예배를 드림.
대한기독교감리회 광정교회당 입당예배 기념 사진 맨 좌측에 서 있는 분이 박 선생이다. 완공은 안 됐지만 우리들 전역일이 가까워서 서둘러 입당예배를 드림.

 

생전 들어 보도 못한 예수님 밥

저녁을 짓던 부인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이 우리를 맞아 들였다. 이상하게 밥을 더 짓는 기색도 없이 상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 밥이 그렇게 넉넉한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물었다.

우리가 올 줄 알고 저녁을 지었습니까?”

아니오.”

그러면 어찌 우리가 먹을 밥까지 지었습니까?”

, 우리는 저녁이면 항상 예수님 밥을 짓습니다.”

예수님 밥을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 예수님 밥은 참으로 흥미 있는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는 오래 가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풀려지게 되었다. 그날은 아예 저녁을 그 집에서 먹기로 하였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 강에서 대강 씻고 그 집에 갔는데 다른 형제들은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예수님 밥이 궁금해서 그 부인이 예수님 밥을 어떻게 푸나 하고 부엌으로 난 샛문으로 유심히 보게 되었다.

먼저 솥뚜껑을 열더니 주걱으로 열십자를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뚝 솟은 밥 한 그릇을 푸더니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가 밥을 다 푸고는 물을 붓고 다시 그 밥그릇을 솥 안에 넣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먹지 않는 밥이었다. 그것이 예수님 밥이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보였다.

나는 이런 미신적인 행위를 고쳐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식사시간에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박 선생님, 예수님 밥이 무엇입니까?”

, 예수님 밥이라고 오래 전부터 퍼 왔습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자기 동네에서 이십여 리 더 들어가면 마지막 동네가 나오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막차를 타고 와서 자기 동네까지 걸어 들어오면 어두워지는데 거기서 다시 이십여 리를 가야 하니까 시장도 하고 피곤도 하단다.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혹 있는 그들을 위하여 밥을 푼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그네를 위한 밥이었다. 식사시간을 놓친 배고픈 사람을 위하여 푸는 사랑의 밥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예수님 밥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그들을 정죄 하려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한없이 따뜻한 주의 사랑을 말없이 실천하는 진실 된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는 그 후에도 종종 그 예수님 밥을 먹는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전도사님 일병이 나를 조용히 부르는 것이었다. 키는 작고 체구는 왜소하였지만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우리들이 당회를 하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는 나를 두고 기도하고 그 응답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목사 앞에 앉아 있는 평신도 같이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전도사님 일병이 내게 하는 말의 결론은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나의 진로 문제인데 한마디로 내게서 목회자의 자질이 보이니 제대하면 신학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결정해 준다면 신학공부를 하는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나온 대전 감신의 교수님에게 추천을 해서 어떤 장학금을 끌어대더라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도 제대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학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유롭게 교회를 섬기는 것은 좋았지만 24시간 매여 사는 목사의 생활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고 생각해 볼 고려조차 없었던 터였다.

전도사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자신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천 병장님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입니다.”

제가 예비 되지 않았는데요? 저는 공부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입니다. 다시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이전에 그 식중독 되었을 때 주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한 기도 때문에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지만 내 육신은 그것을 꾹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가 기도해 보자고 하면서 그 날의 이야기를 마쳤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혼자 웃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주의 부르심에 항복하다.

이제 벽돌은 만들어졌다. 구멍 있는 규격품도 아니고 흙벽돌 같이 네모진 막 생긴 벽돌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재산이었다. 성도들은 그 벽돌을 보면서 벌써 아름다운 교회당을 그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우리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여름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비오는 날이 많아지고 강물은 점점 불어 올라왔다. 벽돌을 빨리 작업 현장으로 날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벽돌은 강물에 떠내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도 사람도 없었다. 발을 동동 굴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개천절이 다가왔다. 그 날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날에 우리는 벽돌을 다 날라야 한다. 교회에 광고를 하였다. 그 날만큼은 열일을 재껴 놓고 벽돌을 나르자고 하였다. 아침을 먹자마자 달려갔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농촌의 바쁜 사정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 선생 내 외분만이 리어카를 준비하여 나왔던 것이다.

농부들에게는 공휴일이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 데는 가장 좋은 날이었다. 아이들의 손도 학생들의 손도 모두 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 선생은 자기의 일을 다 재껴 놓고 나온 것이었다. 별수 없이 우리 군인 넷과 함께 리어카 한 대를 가지고 벽돌을 나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벽돌이 얼마나 무거운지 리어카에 얼마 실어지지를 않았다.

욕심을 내었더니 리어카 타이어가 찌부러져서 펑크가 날판이었다. 그래서 리어카 한 대 분에 열 몇 장씩만 나르기로 하였다. 그러니 오전 내내 그렇게 열심히 하였는데도 일한 표시조차 나지 않았다. 맥이 풀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일을 독려하여야 할 나 자신부터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만 모든 것을 팽개쳐 버리고 어디든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처럼의 외출을 잘 즐기고 있을 때에 우리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올라올 때에는 짜증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 한줄기 새로운 용기를 갖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양양 지역의 청년연합회 회장과 부회장이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몇 청년들과 함께 오려 했지만 실패하고 둘만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둘이 온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좋았다. 특히 여부회장은 군인들에게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그의 말은 우리를 충전하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는 얼마간 새로운 힘이 나서 떠들썩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신바람이 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후를 넘어서면서 차츰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벽돌은 절반도 옮기지 못했는데 시계는 벌써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섯 시까지는 귀대를 하여야 하는데 이제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자신을 잃고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참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피곤하였고 힘을 잃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나님, 참으로 계시다면 말 좀 해 보이소, 우리가 누구 일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못 본체 하십니까?’ 그러다가 번쩍 정신이 났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일 하는 것이 아니지?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적을 구하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어카를 밀면서 혼자 기도를 했다. ‘하나님, 우리는 기적을 원합니다. 아니 지금 기적이 필요합니다. 이제 한 시간 안에 이 벽돌을 다 나르게 역사 해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꼭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아 보였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이오.’하고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칠 뻔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참아 버렸다. 오히려 하나님이 더 불쌍히 보시도록 마지막 투혼을 불살라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30분이 지나 이제 귀대 시간이 30분 남았는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할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일을 마치자고 궁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포기가 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5분 여 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는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일을 마치자 말하려고 일어서는데 저쪽 한길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우리 중대장님이었다. 트럭을 타고 어디를 갔다 오는 눈치였다.

이제는 꼼짝없이 끌려가게 되었구나 하고 달려갔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 중대장님, 교회당 지을 벽돌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외출증 끊어 가더니 여기서 하루 종일 그걸 했단 말이야?”

어찌 되었어?”

아직 반도 못했습니다.”

 

그럼 이 트럭으로 몇 번하면 안 되겠나?”하는 것이다. 안되기는 왜 안 됩니까? 되고말고요.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충격을 받았다. 기적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중대장님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앞에서는 중대장님! 감사합니다.” 하고 참으로 경이에 찬 거수경례를 올려 부쳤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얼마나 진실한 감사를 수 없이 드렸는지 모른다.

중대장님이 계시니 귀대 시간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다시 용기백배하여 벽돌을 차에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부족하였다. 한 대 분 싣는 시간이 30분이나 걸렸다. 그래도 오후 내내 리어카로 한 것보다 많았다. 이제 두 번만 더 실으면 다 할 수 있어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실어 보낸 후에 얼른 동네로 뛰어 갔다. 주일학생들의 집을 쏜살같이 다니면서 모두 다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기에 붙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들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몇몇 아이들만 나왔는데 그래도 힘이 될 것 같았다. 그 중에는 네 살, 다섯 살의 유치부도 있었다. 모두가 힘을 다하여 했다. 혹시 중대장의 마음이 변하여 아무래도 오늘 다 하기는 글렀으니 이만하고 들어가자하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나는 호랑이 감독관으로 변하여 있었다. 그래도 여름의 낮은 일곱 시에도 어두워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한 차 분만 남았다. 차가 오기까지 우리는 벽돌을 한 장소로 모아들였다.

우리의 손은 손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장갑 없이 벽돌을 만졌기에 너무나 상하여 있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의 손 따위야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 받으세요.”하면서 유치부 아이 둘이 벽돌 하나를 맞 들고 와서 내게 건네는데 나는 무심코 그 벽돌을 받아 들면서 참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아이의 손가락이 억센 벽돌에 닳아져서 새빨간 피가 비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의 눈이 번쩍 열려져 다 저녁 어수룩한 곳이었지만 너무도 환하게 그의 피를 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호랑이 같이 독려하는 나의 목소리에 질려 꼼짝없이 나부대다 피가 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안타까이 울면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의 손이 아니었다. ! 그 손은 주님의 손이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온 종일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계셨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 모습 그대로 그 손으로 내 앞에 계신 것이었다.

코끝이 시려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소리 나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님! 당신은 오늘도 우리의 현장에서 피를 흘리시고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오늘도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주님! 이제 제 이 손도 주님의 손과 같이 되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니 나도 주님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 주님이 피를 흘리시니 나도 생명 바쳐 일하겠습니다. 주님! 이제부터 당신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그 기도는 진실이었다.

그 어린아이의 손에서 주님의 손을 본 나는 전도자가 되어 죽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목사의 별명을 진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 부대는 늦은 8월에 예비부대로 이동을 하였다. 자연스럽게 교회당 건축은 이제 박 선생님의 몫이 되었다. 그는 이제 그 교회의 완전한 주인이었다. 농사를 지어가면서 혼자서 벽돌을 쌓고 교회당을 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전도사님 일병이 시간을 바쳐 백방으로 뛰어 다니며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가면서 공사는 어렵사리 진행되어 갔다.

그리고 11월 하순에 바깥벽을 바르지 못한 채로 입당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특별 외출을 받아 입당예배에 참석하였다. 일 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모든 것이 변하여 있었다. 장년 3명 주일학생 3명의 초미니 교회가 군인을 제외하고 장년이 2-30여명 주일학생이 30여명, 중고등부 학생이 1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감리교단에서 교역자를 파송하겠다는 전갈도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나 있었다. 입당예배는 성대히 드려졌다. 주일 학생까지 모두 참석한 새 교회당은 아직은 아무 것도 단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활기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은혜가 충만하였다. 아마 사랑의 정성들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제대를 앞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었다. 채 일 년도 안 된 세월 속에 나는 너무나 많은 경험을 가졌다. 아니 주님의 손은 나를 그렇게 이끌어 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는 누가 백 번을 물어봐도 주의 길을 가리라고 대답하였다.

현재의 광정교회. 앞 쪽은 교육관, 뒷쪽이 본당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재성 목사이다.
현재의 광정교회. 앞 쪽은 교육관, 뒷쪽이 본당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재성 목사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장 고신의 목사가 되었다. 전도사님 일병은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주일학교를 맡아 이끌었던 서 병장은 통합측 목사가 되어 지금은 미국 이민교회의 목사로 있다. 찬송을 인도하였던 박 상병은 그 후 월남에 파병되었다는 말만 들었고 아직은 소식을 모르고 있다. 현재의 광정교회는 장교출신인 박재성 목사님이 맡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1971년도의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의 광정교회는 그렇게 우리들을 바꾸어 놓는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신 역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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