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전도사 학교에서 '천개척'이라고 불린다면서?”

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7

 

구경이나 한 번 하지

장마제일교회는 은혜 중에 성장해 갔다. 교회당도 마련하고 사택도 있고 제법 자립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초등학교 교장, 지서장, 면 서기 등 유지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나의 신대원 시절은 공부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제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학교로 진주노회에서 목사님 한 분이 방문하면서 그런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분은 진주노회연합당회 회장인 심상래 목사님이었다. “천전도사는 별명이 천개척이라면서? 이번에 우리 연합당회에서 진주 문산에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사람을 찾으니 만장일치로 천 전도사를 추천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장마제일교회는 대학부 학생을 교육전도사로 모실만큼 재미있는 교회였는데 왜 또 개척을 한단 말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나를 달래던 목사님은 한번만 가서 구경이나 하고 거절하라는 것이었다. 간곡한 그 말에 끌려 진주 문산을 구경하게 되었고 전국에서 11동인 문산은 개척을 해야만 하는 지역으로 내 마음을 끌었다.

 

그런 와중에 교육전도사가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나의 마음은 문산으로 가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장마제일교회를 맡길 수 있는 교역자가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에게 보여주시고 마음이 일게 하시고 이끌어 가셨다.

 

문산에는 일제 강점기 때 장로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교회당을 폐쇄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장로교회가 없었다. 감리교회가 유일하게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감리교회에 장로교인 한 가정이 있었는데 김범세 집사 가정이었다. 장로교회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개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올 기회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감리교회가 조금 큰 부지를 확보하고 새로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구 건물을 매도했는데 알고 보니 그 김집사 가정에서 매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건축이 끝나기를 기다려 완전히 이사를 가고 난 다음 우리 교회를 찾아와 등록을 했다. 그때 우리는 그 동네 가축병원 2층을 세로 얻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루는 김범세 집사가 내게 말했다. “전도사님, 제가 구입한 구 감리교 건물로 교회를 이전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될 리가 없었다. 우리는 당장 구 감리교 건물로 예배 장소를 옮겼다.

 

그런데 그 교회당에는 전에 목사가 살던 사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김집사는 우리에게 사택을 쓰라고 하고는 자기는 재를 모으는 헛간을 손수 개조하여 방을 넣고 거기서 살겠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집주인이 여기 사는 게 원칙이고 얻어 사는 우리가 거기 사는 게 도리에 맞는다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로 우리를 사택으로 밀어 넣었다. 개척교회는 월세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모든 시설을 공짜로 사용하게 되었다. 문산교회는 하나님이 김범세 집사(후일에 장로로 임직)를 교회의 큰 일꾼으로 예비해 두었던 것이다.

개척 첫해 여름성경학교에 많은 어린이들이 왔다.
개척 첫해 여름성경학교에 많은 어린이들이 왔다.

 

전도사님 그 친구 열병입니다.

교회를 잘 나오던 청년 하나가 주일 예배에 빠졌다. 그의 친구들에게 물으니 그 집에 사람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왜냐 하니 장티푸스라는 열병에 걸렸다면서 나더러 심방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전염된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나는 말씀을 믿었다. 마태복음 814-15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하지 않았는가? 주일날 그 청년을 교회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 앉히고 예배를 드린 뒤 가지 말고 함께 기도하자고 하면서 그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구하였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시던 주님 이 청년의 열병도 떠나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한 다음 청년더러 집으로 가라했다. 청년은 저녁 예배 시간에 혼자서 교회에 왔다. 그의 말로는 집으로 가는 중 열이 내리고 아프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많은 청년이 교회에 출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부교역자로 간 부민교회에서도 이런 역사가 두 번이나 계속되었다. 당시 부민교회에는 전도 왕이라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그는 막무가내로 무조건 전도하는 분이었다. 그가 어떻게 전도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가 나와 함께 심방을 가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에게 예수 믿습니까?” 묻고는 교회 안다닌다 하니까 다짜고짜 안 믿으면 지옥 가요.”하는 것이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데 얼굴이 뜨끈했다. 와 욕이나 얻어먹지 않을까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여 교회에 등록 시킨 사람이 일 년이면 수 십 명이었다. 어느 날 나더러 자기가 전도한 집에 심방을 가자해서 따라갔다. 그 사람이 열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가족들이 굿을 해야 한다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가족들은 환자를 방구석에 멀찌감치 뉘여 놓고 우리는 마루에서 그를 보게 하였다. 기도해서 안 나으면 굿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814-15절을 읽고 기도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돌아왔는데, 그가 다음 주일날 교회에 제 발로 나왔다. 기도하고 우리가 대문을 나설 때 병을 털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교인들과 함께
교인들과 함께

 

하도례 선교사의 방문

하도례 선교사는 고려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였기에 농촌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는 나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다. 문산에 꼭 한 번 와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대원 3학년 하기방학의 어느 한 주일에 설교자로 모셨다. 그는 나를 관찰하러 왔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중요한 두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1) 학생회 모임에 왜 예배를 합니까?

주일 오전 예배에 설교를 하신 후 오후에 학생회를 관찰하시고 한 가정 전도 심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오전 예배는 선교사님이 설교를 하시고 점심을 함께 한 후 학생회 모임에 나갔다. 나는 학생회 예배에 말씀을 전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러자 하도례 선교사의 특유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 학생들이 오전 예배에 참석했느냐? 저녁 예배에 오느냐?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러면 학생회 공식 명칭이 무엇이냐? <학생신앙운동>이라고 했더니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시면서 학생신앙운동이니 운동을 해야지 왜 예배를 드리느냐는 것이다. 나는 얼른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도례 선교사의 지론은 이것이었다. ‘학생들이 주일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를 다 참석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부터는 장년예배에 참석하여야만 교회를 졸업하지 않는다. 학생회 예배를 강조하면 나중에 장년예배에 적응하지 못해 대학교만 졸업하면 교회를 졸업한다. 그러니 중학생부터 장년예배에 참석하도록 해야 장년예배를 드리는 것이 익숙해지기에 잘한 일이나 학생회 모임에서 또 예배를 드리면 학생들은 예배가 관습화되고 지루해지게 된다. 학생회 예배만 참석하면 된다는 생각과 학생회 모임이 마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인식이 굳어진다. 학생회 모임은 운동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학생회 자치에 맡기고 전도사는 다만 성경공부를 토론식으로 하되 간단하게 마친 후 매 주일마다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첫째 주는 지난달에 배운 성경 공부를 가지고 퀴즈대회를 하고, 둘째 주는 찬양대회를 하고, 셋째 주는 전도대회를 하고, 넷째 주는 골목 청소봉사를 하는 등 그 운동은 학생들이 개발하여 실행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 후 목회하는 가운데 이를 애써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2) 성경책을 집어넣으십시오.

학생회를 마치고 전도 심방을 갔다. 부인이 우체국 직원인 자기 남편을 꼭 전도해 달라고 요청한 가정이다. 나는 해왔던 대로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열어 성경책을 꺼내 놓았다. 그러자 다리가 길어 엉거주춤 앉아있던 하도례 선교사가 나더러 성경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으라는 것이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 듣자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아무 무기도 없이 있는데, 당신만 무기를 꺼내 놓았으니 불공평하다. 그리고 저 사람이 성경책을 보자마자 겁을 내고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글지도 모른다. 전도는 일방적으로 내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또 한 번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돈키호테 같은 분이라고 회자되는 분이었지만 나는 그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봄소풍을 가서 뜩방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며
봄소풍을 가서 뜩방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며

 

교회당 부지 구입과 이금조 목사

문산교회는 연합당회장 심상래 목사의 후원과 당회장 이금조 목사의 지도 아래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당 부지를 물색하다가 누가 논 두어 마지기를 팔겠다고 해서 덜렁 계약을 하고 이금조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금조 목사님은 연합 당회를 움직여 문산교회당 부지 구입을 위한 헌금을 하는 것으로 결정해 주었다.

 

금요일 학교를 파하고 진주에 도착하면 바로 이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러면 오늘 어디어디 가봐라 연락해 놨다 하면 달려가서 헌금을 전달 받았다. 그렇게 헌금을 모금하여 부지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금조 목사님과의 관계에서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연합당회로부터 받는 생활비가 턱없이 적은 것을 알고 외국에 요청을 해서 도움을 주시려고 하셨다. 그때는 온라인이 안 되어서 우편으로 수표가 도착하면 당신이 꼭 부산외환은행에 가셔서 찾아다가 주었다. 이상했다. 나도 학교를 매주 가기에 부산에 나가는데 그냥 수표를 주면 찾아 쓸 수 있는데 왜 그럴까 하고 내심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표를 주면서 미안하다. 내가 바빠서 부산 갈 기회가 없어서 못 찾았다. 이번만 네가 찾아 쓰라했다.

 

외환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나서야 목사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는 온라인이 없어 후원하는 교회에서 개인 수표를 보내왔고 은행은 그것을 추심하여야 했기에 수수료(10%)가 많았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수수료를 본인이 직접 부담하시고 나에게는 외국에서 보낸 액수 그대로 주셨던 것이다. 다시금 어른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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