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4

 

한상동 목사님과 삼일교회

제대를 하였다. 보따리 하나 들고 마산에서 부산으로 왔다. 신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삼일교회에 등록을 하고 친구가 하는 전집류 책 판매를 하면서 사무실에서 살았다. 은퇴를 앞두고 계셨던 한상동 목사님은 나의 신학교 입학 추천서를 써 주었고 결혼 주례까지 해 주셨다.

당시 결혼예배는 대체로 2시간 정도가 보통이었다. 여름에는 신부가 쓰러지는 일이 허다했다. 은퇴가 가까웠던 한 목사님은 삼일교회 담임목사와 학장으로서의 마지막 결혼 주례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대단한 선언을 하셨다. “오늘 나는 이들의 결혼 예배에 큰 개혁을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결혼 예배를 한 시간에 마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딱 한 시간에 마치셨다.

교단의 큰 어른이 결혼 예배를 한 시간에 마쳤다는 것은 곧 모든 결혼 예배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결혼 성사에는 교단 총무를 지내셨던 심군식 목사님의 적극적인 중매(?) 덕분이었다. 당시 삼일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신현국 강도사님과 심군식 강도사님이 강도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1년여를 삼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빠지지 않는 한상동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았다. 어느 주일 교회당이 웃음으로 발칵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는 헌금자를 일일이 호명하였다. 한상동 목사님이 먼저 십일조 명단을 부른 뒤 감사헌금 명단을 부르는데, 방석대 씨 감사헌금 했습니다.“하자 갑자기 좌석에서 누가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목사님은 장로님을 보내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봉투를 뒤집어 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제야 봉투 뒷면을 보시고는 아 ㅇㅇ집사님이 방석대금을 내셨습니다.“ 방석을 깔기 위해 헌금을 작정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헌금을 냈으니 알 수가 없었던 목님은 방 석대 씨라고 했던 것이다. 교회당은 한동안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상동 목사님의 특징은 축도에 있었다.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인자하신 음성의 축도는 축도만으로 은혜였다.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마지막 축도를 하시는데 지금은.....” 그 말씀만으로 삼일교회당은 울음보가 터져 목사님의 축도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누구도 예배마침의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한동안 눈물을 쏟아냈었다.

거제도 문동교회와 삼거리교회를 함께 맡았기에 두 교회가 함께 합동으로 야외예배를 드렸다.
거제도 문동교회와 삼거리교회를 함께 맡았기에 두 교회가 함께 합동으로 야외예배를 드렸다.

 

새벽송에서 받은 건빵 한 봉지

삼일교회는 새벽송을 대대적으로 했다. 나는 산복도로 위쪽으로 가난한 동네를 배정받은 대장이 되어 그 지역의 권찰과 함께 새벽송을 돌았다. 그 당시는 새벽송을 받은 가정은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가 대원들에게 내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쪽방같은 가정을 찾아 그 집 문 앞에서 찬송을 부를 때는 숨을 죽이기도 했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돌았을 때 인도하던 권찰은 이제 한 집만 더 하면 끝난다고 내게 일러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도 없는 데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사실은 그 위로는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어서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해 하면서 따라갔는데, 언덕 같은 곳에 오더니 다 왔습니다. 이제 찬송하시죠.” 한다. 우리는 어리둥절하면서 찬송을 불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고 나니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곳에서 거적이 올라가고 나이 많은 노부부가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집이 없어서 토굴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문도 없이 가마니 펴서 만든 거적 대기가 대문의 전부였다. 노부부의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한 듯 보였다. 가난한 자기들에게도 새벽송 찬양대가 와준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민 선물, 그것은 건빵 한 봉지였다. 그것을 받아 쥐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받는 것 같아서 말이다.

 

새벽송에서 받은 물세례

19737월인가 비가 억수로 오는 주일 거제도의 한 작은 교회에서 총각전도사로 목회를 첫발을 내디뎠다. 문동교회이다. 그해 1225일 새벽이었다. 나는 신학대학 1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을 맞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청년 학생성도들이지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새벽송을 돌기로 한 것이다. 몇 명은 안 되지만 시골의 특성상 많은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시간이 걸리는 새벽송이었다. 멀리 한 학생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그 학생은 극구 자기 집만은 그냥 지나가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버지는 아들이 교회에 갔다 싶으면 교회로 곧장 달려오는 분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좀 특별하였다. 나는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느라 몰랐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내 뒤로 오더니 휘장을 들치고 그 뒤에 들어가 숨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설교를 계속하였고 교인들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고 바로 교회 문이 벌컥 열리면서 그 학생의 아버지가 상기된 얼굴로 들어서는데 웬일인가 그 손에는 낫이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슨 설교를 하는지 모르게 설교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반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분명 교회에 왔다고 정보를 들은 아버지가 와보니 정작 아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더니 교회당 창문 뒤에서 앞으로 살피면서 내 뒤쪽도 살펴보는데 나는 등골이 오싹하며 식은땀이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그 학생은 그렇게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다.

!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어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신 주님! 우리의 피할 바위요 반석이신 주님! 오늘 저 가녀린 학생을 휘장 뒤에 숨겨 살려 주셨나이다. 그렇게 우리들을 숨겨 주옵소서! 그런 감사와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씩씩거리던 아버지가 가고 그 아들은 몰래 교회당을 빠져나가 어디 다른데 갔다 온양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 터이었다. 그러니 그 집 앞에서 어찌 찬송가를 부르겠는가? 그런데 웬일인가? 오기 전에는 그냥 지나치리라 했었는데 막상 그 집 앞에 오니 해야 되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주의 탄생은 정작 이런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핍박이 무서워 못한다면 목사가 되어 무엇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 집 앞에서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것이니 찬송을 부르자고 했다. 도망 갈 때는 가더라도 해야만 했다. 그 학생은 피하여 있었다. 단호한 나의 음성은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게 하였고 찬송은 시작되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조용히 시작한 찬송을 다 부를 때가지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찬송만 부르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나야 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찬송을 불렀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으니 우리는 더욱 마음이 놓여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법 용기를 낸 큰 소리로 만백성 맞으라하는데 갑자기 담 너머에서 "기쁘기는 무엇이 기뻐" 하는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그 추운 엄동설한에 물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고요한 밤을 부르는 시간에 일어나 나와서 소 먹으라고 부어놓은 물을 담 너머로 끼얹은 것이다. 나와 함께 대원들 거의 다 물세례를 받았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기겁을 하는 소리에 아마도 그 아버지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반분이라도 풀렸을 것이다. 그래서 대문 밖으로는 나오질 않았다.

!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고 그는 물로 세례를 주는 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그리고 요단강을 지나면서 물세례를 받았더란 말인가? 우리는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하면서 물세례를 받았으니 잊을 수 없는 지난날의 추억이며 신앙의 담력이 되었다.

문동교회 주일학생들과 교우들
문동교회 주일학생들과 교우들

 

산골에 사는 반ㅇㅇ 집사님

바다로 둘러싸인 거제도 섬에도 산골은 있다. 반ㅇㅇ 집사님은 산골 외딴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반 집사님은 언제나 혼자 교회에 다니셨다. 심방을 가서야 형편을 알게 되었는데 부인이 수년간 투병 중이었다. 부산 등지의 종합병원을 전전하면서도 병명조차 알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토요일이면 일과처럼 심방을 했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했다. 6개월을 그러던 어느 주일이었다. 그 부인이 주일날 교회에 온 것이다. 병원에 갈 때는 업고 내려오거나 들것에 들려왔던 부인이 걸어내려 왔으니 동네 사람들도 교인들도 다 놀랐다. 어찌 왔냐고 물으니 내가 죽어도 교회에 가서 죽어야겠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라도 한마디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죽기 살기로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마 그의 그런 결단을 보시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합천의 개척을 위하여 문동교회를 떠났었기에 그 결실을 보지 못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까마득히 그때의 일을 잊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어느 부인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전도사님!”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 부인이었다. “전도사님 접니다. 저가 이렇게 나아서 생생합니다.” 너무너무 반가웠다. 하나님은 교회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 부인의 믿음의 결단을 받으셨던 것이다.

 

추수 감사절, 제대로 합시다.

문동교회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교회였다. 개척한지는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갔지만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다. 오죽했으면 문동교회를 개척하여 지원했던 거제여전도회연합회 총회 석상에서 문동교회는 덤벙(웅덩이)에 돌 던져 넣는 격이니까 이제는 그만 합시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한 번 해보겠다고 부임을 했던 새파란 전도사가 뒤에 앉아 있는 것도 모르는 여전도 회원들의 발언을 듣고 회장은 나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젊은 전도사(그때는 26살의 총각이었다)가 한번 해 보겠다고 저 뒤에 앉아 있는데 다음 봄 총회까지 시험 삼아 한번만 맡겨 봅시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나를 확인한 회원들이 어쩔 수 없이 지원해 주기로 한(그래봐야 후원금은 월 1만원이었다) 교회였으니 알만도 할 것이다.

그러니 사명감에 불타던 청년 전도사였고 아무 물정도 모르는 전도사였기에 설교는 감정에 치우친 외침이었음이 사실이었다. 추수감사절이 되었다. 그런데 너무 형식적이었다. 실망이 컸다. 그래서 다음 주일날 호되게 나무라는 설교를 했다. “이것도 추수감사절 헌금이라고 했습니까? 다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러니 이 교회가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목회자 한 분도 모시지 못하는 교회가 된 것 아닙니까? 내 말이 틀렸으면 당회장에게 말해서 나를 내 쫓으십시오. 예배 마치고 세례교인 이상은 모두 사택으로 들어오십시오.”

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오는데 창문 사이로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전도사가 저런다고 뭐가 되겠어?” “새파란 전도사가 뭘 어쩌겠다고 저러냐?” 나이 많은 회계집사가 말한다. “그래도 들어 오라카이 들어가 보기나 합시다.”

그런데 그들 틈에 새 신자 한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그 부인은 이번 여름에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었다. 부산 삼일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이 여름성경학교 봉사활동을 왔다가 전도를 나갔는데 왜 이제 왔느냐면서 교회가 전도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에 나온 부인이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전도사를 지극히 섬겼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교회를 섬겼는데 그것이 못마땅해서 자기는 절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겠노라고 결심을 해서 지금까지 교회와 담쌓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오라는 말을 안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복음은 반드시 기다리고 있는 택자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었다.

부인은 세례교인도 아니면서 교인들 틈에 떡 버티고 앉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소득을 얻는 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교인의 의무인데 농촌에서는 추수를 하는 것 외에 십일조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추수를 하고나면 그 십일조를 가지고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하면 목회자의 일 년분 양식이 됩니다. 추수감사 제대로 한 번 해 보입시더. ! 회계 집사님 올해 추수를 얼마나 했습니까? 그럼 십분의 일은 얼마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다행히 회계 집사였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바로 그 새 신자 부인이었다. 시험 받을 까봐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올해 얼마를 추수했으니 얼마를 내겠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자 누구도 끽소리 못하고 돌아가면서 모두가 다시 추수감사 헌물을 작정하는 것이었다. “! 회계 집사님 모두 합하면 얼마입니까? 도정을 하면 쌀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 한 달에 얼마씩 교역자에게 양식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제대로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교인들은 그 뒤로 말씀대로 하면 된다. 순종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게 문동교회는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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