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최종회)

 

목사님 나와 보세요

인천으로 올라온 나는 이제 죽음만 맞이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일정표에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J일보 인터넷판에 사진마당이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을 포스팅하고 댓글을 달면서 감상하는 코너였다. 인천 오기 전부터 사진마당을 좋아해서 하루에 꼭 한 번씩 들러 지인들과(물론 인터넷상으로) 인사를 나누는 버릇이 있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교제하게 되었다.

하루는 댓글에 할렐루야! 샬롬! 이라는 글이 달려 눈길을 끌어 알고 보니 독실한 신자였다. 그와는 특별한 교제를 나누고 있던 참에 내가 인천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나를 억지로 끌어내어 카메라를 사게 하고 사진 모임에 가입하게 하여 뜻밖에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지도록 해 주었다.

불신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가들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그들과 사진 촬영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 사진이 될 만한 곳이면 다 찾아다녔다. 그러기를 6개월이 흘러 사진 전시회도 하고 제법 사진 찍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루는 나를 끌어낸 그 동생(우리는 형 동생으로 호칭하기로 했다)이 말했다. “형님, A(일간신문)에서 시민기자를 모집한데요. 한 번 가 보실래요?” 나는 호기심에서 그와 동행했다. 사진부에서 사진 기자들과 함께 이론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어 실습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거기까지였다.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일에 투입하시기를 원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나는 호출을 받게 된다.

여러 개의 사진동호회에 가입하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던 시절 한 동회회 회원들과 함께
여러 개의 사진동호회에 가입하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던 시절 한 동회회 회원들과 함께

코람데오닷컴 편집장이 되다

나를 호출한 분은 정주채 목사님이었는데 코람데오닷컴(이하 코닷)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나더러 편집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언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기에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나 외에는 사람이 없으니 배우면서 하라고 권하기에 할 일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무엇인들 못 하겠나 싶어서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코닷은 게시판 형태의 사이트였는데 하루 방문자가 한 명, 많으면 열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신문 형태로 사이트를 변경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언론 사이트 전문 업체를 찾아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달라고 일을 맡겼다.

2006년에는 인터넷 언론이 붐을 타고 막 일어나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 업체 사장이 직접 발로 뛰던 시절이었다. 며칠 후 그가 인천으로 나를 직접 찾아왔다. 그리고 코닷 임시 홈페이지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기사를 올리며 어떻게 출판하는지, 사진은 어떻게 하는지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인터넷 신문도 일간신문의 사진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왜 A사 사진부에서 훈련하게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는 일주일간 말미를 줄 터이니 그동안 연습을 많이 하고 자신이 생기면 연락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급해서 내일 당장 살펴 주면 안 되겠나 했더니 대학에서 관련학과를 나온 젊은 친구들도 3일 정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60 노인(?)이 해보았자 카페 정도일 텐데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 내일 한 번 열어보고 됐다 싶으면 온라인에 연결해 달라고 했다. 약속대로 그는 다음날 열어보고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 목사님이 한거냐? 이 정도면 훌륭하다. 바로 연결하겠다.” 그렇게 코닷은 인터넷 신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국민일보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인터넷 신문으로 만들고 웹상으로 연결은 했지만, 기사가 문제였다. 실을 게 있어야지 며칠에 한두 건으로는 신문이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개척도 교회 개척은 겁 없이 뛰어갔지만, 언론개척은 산 넘어 산이었다.

기사가 없어 고민을 하고 있던 때에 전화가 한 통 왔다. K일보 기자였다. 코닷 기사 중에 좋은 글이 있어 K일보에 인용하고 싶다는 것이다. 출처를 밝히고 쓰시라고 허락했다. 그는 자신이 개신교 중 고신담당 기자인데 앞으로 많은 정보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총회가 있거나 하면 함께 동행하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기획기사를 쓸 때에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30여 분 정도 인터뷰를 한 다음 기사에는 코람데오닷컴 천헌옥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는(네이버에서 천헌옥 목사를 검색하면 당시 기사를 읽을 수 있음) 식으로 신문에 싣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어 번 올라갔을 때 기독교 언론들이 코닷을 주시하게 되었다. 여러 기독언론사들이 전화를 해 와서 기사제휴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기사가 많이 부족했던 나에게 그들이 천사가 되어 날아왔던 것이다. 그때부터 코닷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진기를 들고 전국 사진명소를 찾아다니던 나는 이제 펜을 들고 각종 세미나와 포럼, 열린마당을 찾아다니면서 기사를 쓰고 사진기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언론에서 코닷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 그 집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확실하게 알려면 코닷을 참고해 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은 자기가 취재하고 싶은 것만 끝나면 다른 기사를 위해 나가지만 나는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 열린 토론 시간에 나온 말도 기사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코람데오닷컴사에서 마련한 편집인 은퇴식을 하고 단체사진
코람데오닷컴사에서 마련한 편집인 은퇴식을 하고 단체사진

한 교회를 담임하지는 않았지만 4 교회를 맡아 설교를 하다

2006년에 시작한 코닷은 2018년 은퇴할 때까지 13년여를 섬겼다. 나는 인천에 올라와 죽기만 기다렸는데 하나님은 은퇴할 때까지 시간을 주셨다. 그리고 코닷 편집장만 아니라 간간히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모두 4 교회였다. 한 교회에서 6개월 정도씩 설교를 했다.

첫 번 교회는 교인들 간 분쟁이 일어나 많이 흩어지고 붙어있는 교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공격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설교 시간에는 아멘 소리도 없었다. 냉랭한 얼음 그 자체였다. 당회장이 노회 안에서 설교자를 구하여 보내다 보낼 목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쪽 편에서 다음은 다른 쪽에서 거절하니 누굴 보내나 걱정하다가 내가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나도 일회성 대타 설교자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주일 또 가라고 전화가 왔다. 그렇게 한 달을 갔더니 이제는 후임이 올 때까지 계속 가라는 것이다. 양쪽에서 계속 보내 달라고 전화를 했단다. 그렇게 6개월을 설교했더니 교인들이 풀어지기 시작했고 떠나갔던 교인들도 다수 돌아왔다. 그리고 후임 목사가 정해져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 설교 섬김을 마칠 수 있었다.

두 번째 교회는 합동 측 교회였는데 어떻게 돌고 돌아서 나에게 설교를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 달쯤 설교했을까 교인들이 연명 날인을 하여 나에게 그 교회에 부임해 달라고 청빙서를 내밀었다. 목사님이 부임하면 합동에서 고신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럴 수 없었다. 지하 50여 평을 분양받아 있었지만, 사택을 구할 힘이 없어 사택을 구하여 오라는 것이었다. 인천 집을 팔아도 서울서 전셋집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집을 구하여 올 때까지 부임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천에서 서울까지 50여 분을 운전하고 가야 했던 교회지만 매 주일 한 번도 빼지 않고 꼬박 1년을 설교목사로 섬겼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이사 올 힘이 안 되니 아무래도 좋은 목사를 구하라고 하고 설교 목사 사임을 했다. 그런데 한 일 년이 지났을까 다시 나더러 설교를 부탁한다. 합동 측 목사가 왔지만 사임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6개월을 설교목사로 섬겼다. 그리고 후임이 부임하여 나는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서울시민교회를 맡고 있던 최한주 목사가 나더러 가서 설교목사로 섬기라고 부탁한 푸른숲교회인데 합동하기 전 고려 측 교회였다. 서울시민교회를 내려놓고 작은 교회를 섬기겠다는 최 목사는 자기가 정리하고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그 기간 동안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 훌륭한 결단 앞에 나는 감동하였고 6개월 동안 푸른숲교회를 맡아 설교했다.

네 번째 교회는 서울 모 교회인데 교회당을 예쁘게 신축하고는 담임목사가 은퇴한 틈을 타서 교인 중 한 패거리가 교회를 들어 먹을 욕심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교회였다. 이 교회도 6개월을 설교하였고 후임 목사가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뒤 그 패거리들은 다 치리를 받고 교회를 떠났으며 지금은 은혜롭게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집인 은퇴하다

2015127일 부산 소명교회당에서 열린 코닷 총회에서 신구 편집장 교체 인사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후임 김대진 목사에게 코닷의 모든 것을 맡기고 편집인으로 근무하다가 201893일 은퇴를 하였다. 죽으려고 올라왔던 인천에서 다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은 은퇴식까지 마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나는 사진에세이에서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편집장을 은퇴하며 후임 김대진 편집장이 화환을 증정하였다.
편집장을 은퇴하며 후임 김대진 편집장이 화환을 증정하였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천헌옥

 

긴긴 하루가 저무는 것으로 시작한 한 해가

열 번이나 저물었으니 강산도 변하여라 마는

인생은 말하여 무얼하리

돌아보니 그 세월 불새처럼 날아가고

어느 듯 예순이라 꼽는 날이 저물어 간다.

 

10년 세월, 사고 없이 지났으니 감사하고

바통을 넘겨받을 주자가 있으니 감사하고

36백여일 동안이나 침상에 던져지지 않음을 감사하고

기도로 후원하는 동역자가 있음에 감사한다.

 

네 집을 정리하라는 말씀에 목회를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으려 왔던 이곳에서

반 강제로 맡았던 코닷은 마지막 사명이었구나.

 

올 한해도 저물어 가고

코닷의 10년의 해도 저물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벌써 내일의 해가 코닷의 지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 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전화로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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