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10

 

목사를 난처하게 하는 집사님

연희교회는 교회당이 낡아 비가 새어 수리가 필요했지만, 교육관이 없어서 증축이 꼭 필요한 상태에 있었다. 나는 건축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알기에 그리고 학생 2~30여 명과 청년 10여 명, 장년 5명 정도의 교회였기에 엄두가 나지도 않는 일이어서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툼한 봉투가 헌금으로 강대상에 올라왔다. <건축헌금>이라고 쓰고 드리는 분은 <한차남>이라고 쓰여 있었다. 헌금은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 그 헌금은 목적헌금이었기에 따로 저축해 두었다.

그런데 한 6개월 정도 지났을까 다시 두툼한 봉투가 헌금으로 올라왔다. 역시 <건축헌금>이라고 쓴 한차남 집사(후일 권사임직, 김철봉 목사의 생모)의 헌금이었다. 양심에 가책이 일기 시작했다. 기도할 때마다 건축을 위해 기도했지만, 교회에다 꺼낼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 교회건축을 바라는 한 집사님은 헌금으로 목사를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물론 한 집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목사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뵐 때마다 왜 교회를 이 모양으로 그냥 두고 있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아서다. 그래도 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또다시 <건축헌금>이 올라왔다. 홀로 사시고 벌이도 없는 분이 적은 돈이 아닌 현금을 건축헌금으로 드릴까 했는데, 알고 보니 자녀들이 왔다 가면서 드리는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건축헌금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 주일 교회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자고 비로소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은 그리했지만 실상은 막막한 일이었다.

교회를 건축하고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
교회를 건축하고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

 

목사님 그건 사본입니다.

교회당 건축을 염두에 두고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강사는 박종수 목사님이 맡아 주셨다. 목사님은 경기노회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계셨고 언제 부산 갔냐고 하시면서 흔쾌히 집회를 맡아 주셨다. 이튿날 저녁에 설교하시다가 예화를 드셨는데, “어떤 전도사가 신대원 입학을 앞두고 입학금과 등록금이 없어 기도하던 중에...”하셔서 가만히 들어보니 내가 겪은 장마제일교회에서 만난 천사 이야기인데 사실에서 약간 왜곡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목사님 어제 하신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응 무척산 기도원 원장한테서...”

아마도 무척산 기도원에서 수요기도회 때 갑자기 오늘 저녁 설교를 좀 해 달라고 해서 엉겁결에 맡은 설교라 장마제일교회에서 만난 천사 이야기를 간증했는데, 원장은 어디 집회가 있으면 그 간증을 대신 옮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옮길 때마다 조금씩 각색이 되어 왜곡현상이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 그건 사본이고 원본이 여기 있습니다.”

아 그래요? 천 목사님이 원본인가요? 어디 원본을 들어봅시다.”

그래서 그 천사를 만난 이야기 원본을 들려 드렸다.

부흥회는 성공적이었다. 교인들은 은혜가 충만하였다. 학생들부터 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충만하였다. 우선 1인당 1백만 원씩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대열에 우리 집 아이들도 함께하였다. 교인들도 힘을 내어 건축헌금에 동참하였다. 그렇게 2층 건물의 새로운 교회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신축한 연희교회당, 단체사진과 무료급식 장면
신축한 연희교회당, 단체사진과 무료급식 장면

 

신안교회, 웅창교회 되다.

신안교회로부터 전화가 왔다. 개척한 교회가 담임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지금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으니 나더러 와서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시 나를 개척의 현장으로 몰아가셨다.

중부산노회 전도부가 후원금을 대면서 일으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교회는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다. 결국은 그 후원금도 문을 닫으라는 신호로 끊어 버렸다. 천개척이라고 해도 별수 없었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위해 반여동에 선수촌 아파트를 건축하고 있었는데, 그 바로 뒷산에 대지 300평이 매물로 나왔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해운대구청을 찾아가 건축이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대지니 된다고 하는 대답을 들었다.

당장 빚을 얻어 계약을 했다. 당시는 아파트를 건축 중이어서 그리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아파트가 완공되고 난 뒤 울타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길이 없어졌다. 구청에서는 맹지라 길을 확보하지 않는 한 건축허가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설상가상 세 들어 있던 상가의 월세를 인상하겠다고 했다. 노회의 지원금도 없고 빚을 냈기에 이자도 나가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상가를 비우고 나와야 했다. 집기는 모두 처분하고 주일마다 장로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흘렀다. 매입한 땅을 되 파려고 내놨지만, 임자가 없었다. 누가 어리석게 맹지를 사려고 하겠는가?

봄노회가 한 달여 남은 어느 주일에 봄노회 때까지 해결이 안 되면 교회 폐쇄하고 문을 닫자고 장로님과 의논이 모아졌다. 신안교회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다. 누가 그 땅을 사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얼른 나가서 산값에 계약을 했다. 계약금을 받았으니 확실한 계약 성사였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지날 즈음 매입자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잔금을 치르겠으니 등기이전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계약하고 불과 일주일 만에 잔금까지 받은 것이다.

웅창교회당 전경
웅창교회당 전경

 

신안교회, 웅창교회로 거듭나다.

그리고 그즈음에 양산 웅상이라는 동네에 아파트 공사를 하는 바로 옆에 교회당이 매물로 나왔다. 30여 평 정도의 2층 하얀색 조립식 건물로 보기에 아름다운 교회당이었다. 장로님과 함께 돌아보고는 만족하여 당장 계약을 하고 빚이지만 땅 매매금과 살던 사택 전세를 빼 잔금을 치르고 이사를 했다. 이는 일 층은 교회당으로 떨켜는 사택으로 지어졌기에 가능했다.

한 달포가 지나 기쁨으로 입당예배를 드렸다. 교회명도 신안교회에서 웅창교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기쁨도 순간 장로님과 가족들은 부산에서 오기가 힘들다 하면서 이제는 목사님이 알아서 하라고 하며 빠지겠다고 했다. 그것은 담임 목사가 이제는 소신껏 개척하며 목회하라는 장로님의 큰 아량이고 배려였지만 또 가족만 남게 되었다.

아직은 아파트가 입주하기 전이었으므로 주변 환경이 황량한 사막 같아서 섭섭함이 많았지만 기도하며 전도하면서 한 주, 한 주 견디어 나갔다. 고신교회가 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씩 찾아오는 성도들로 교회는 빠진 만큼 채워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하고 그렇게 교인이 3-40여 명이 모이자 후원 없이도 홀로 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여기서 목회를 마치면 되겠구나 하면서 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앞산은 대운산이고 뒷산은 천성산으로 등산하기가 매우 좋은 입지였다. 등산은 빠르면 2시간, 늦으면 3시간을 요하였다. 나는 매일 산을 올랐다. 자연과 마주하고 걸으니 건강하여 좋고 무엇보다도 등산하는 시간 내내 하나님과의 대화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때론 찬송하면서, 때론 눈을 뜨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이런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천개척 말년의 개척목회가 행복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앞길을 그대로 끝나시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 징후가 나타난 것은 어느 주일 아침이었다. 10시쯤 교회당에 내려가서 묵상하고 있는 중에 음성이 들렸다.

야 이눔아 너는 이 교회가 정상이라고 보면서 그리도 태평하냐?”는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했다.

엄격하게 보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유년, , 고 주일학교가 없지 않습니까?” 장년만 모이는 교회, 오전 11시 이전에는 아무 모임도 없는 교회는 사실 이상한 교회였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느냐?”

? , 기도하겠습니다.”

주일이 지난 월요일 대구 동산기도원에 올라갔다.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3일을 금식하며 기도했다. 마음에 결심이 왔다. 사임하고 젊은 목회자를 세워 이 교회를 맡기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심하니 마음이 얼마나 편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 결심을 하나님께 아뢴 뒤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 뒤의 일이다.

이전 입당예배를 마치고 단체사진
이전 입당예배를 마치고 단체사진

막상 밥을 먹고 육신이 기운을 차리자 영혼을 달래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 빨리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기는 하는데 조금 천천히 하자는 것이다. 그 말에 위로(?)를 받은 내 영혼은 차일피일 미루고 미뤘다. 초여름의 결심은 늦가을로 접어들어 추석이 내일로 찾아온 때까지 미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미룰 수 있는데 하나님은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일까? 문제가 터졌다. 추석이 내일이어서 그날은 등산보다 빠른 운동을 하고 마치려고 나는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는데 이게 웬일일까? 소변기에 피가 흥건히 고이는 것이 아닌가? 소변이 아니라 피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소변에 피가 나오면 필히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석 연휴를 마친 뒤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진찰 결과 신장에 아이 주먹 크기의 혹이 발견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악성인지 단순 물혹인지는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위기감은 없었다. 비록 악성이더라도 수술하면 된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다음날 배달되어온 국민일보 신문에서 나의 막연한 기대는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한 면을 가득채운 그날의 특집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무료급식을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부인이 올 설에 설빔을 하다가 갑자기 주방에서 하혈을 했고 급히 병원으로 갔더니 신장암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했는데 전이가 심하여 결국 한 달 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남편이 충격을 받아 무료급식을 쉬고 있었는데 이제 몸을 추슬러 다시 무료급식을 시작한다는 그런 내용의 기사였다.

갑자기 음성이 들렸다. “네 생명이 무엇이냐?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 집을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급히 광고를 냈다. 그리고 젊은 목회자가 왔다. 나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양산을 완전히 떠나 인천으로 이사까지 마쳐버렸다. 하나님은 과연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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