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6

한 번 가보기나 합시다

장인제일교회는 세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하루하루 막막한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4학년 1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휴학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비량하는 여전도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 위해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1976년 제26회 총회 시에 신자 간의 사회법정 소송에 대한 이견으로 고신교단은 분열로 치달았다. 나는 마산의 제이문창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회로부터 청빙요청을 받았다. 그 교회 장로님과 상당히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사택을 어디에 얻을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는 휴학 중이었다.

그렇게 청빙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던 중에 마산에서 개척을 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식사기도를 하게 되었다. 마침 그 교회에 목회 지망생인 한 친구가 함께 동석하였는데 한만상(후에 목사가 되었다.)이라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청년이 창녕 장마에 교회를 개척할 사람이 바로 지금 기도한 전도사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막교회를 방문하는 노회 목사님들
천막교회를 방문하는 노회 목사님들

친구 역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개척할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청빙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극구 사양을 했다. 개척하다 등록금을 마련 못 해 휴학까지 했는데 설마 또 개척을 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자 그러면 그 지역을 한 번 가보고 과연 개척할만한 장소인지 알아나 보자는 말에 나는 구경은 가겠지만 그래도 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곳은 꼭 교회가 서야만 하는 지역이었다. 갈등이 왔다.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 청빙 받아 가고자 하는 교회는 누가 가더라도 할 수 있는 교회였지만 이곳은 당장 개척자가 필요한 곳이 아닌가? 그 음성이 나의 양심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합천에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무모하게 개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부산으로 가겠다. 가서 세 사람을 만나 그들이 기꺼이 개척을 지원하겠다고 하면 개척하고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거절하면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겠다.” 나는 은근히 그들 중에 한 사람 정도는 거절하리라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개척 후원을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천막 칠 후원금을 받아서 천막 제작소에다 10평 정도의 작은 천막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고 이미 청빙을 받은 교회의 장로님에게는 정중히 못 간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창녕군 장마면 동장가리의 동네 야산 언덕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택은 동네 회관에 있는 작은 방 한 칸을 빌렸다. 그리고 교회당 사택으로 들어가기까지 그 동네에서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교회당 착공 예배를 드리고 노회 목사님들과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교회당 착공 예배를 드리고 노회 목사님들과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척추암 환자

천막교회에 나오는 여 청년 자매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너무 아파한다고 해서 심방을 갔다.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종합검진 결과 척추암으로 판명되었다. 척추 안에 암이 자라 모든 신경을 누르므로 온몸이 아파 견딜 수 없어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 당시는 수술이 불가하므로 집에 가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아 놓고 있는 환자였다.

그때 나는 신학교를 다니던 7년 동안 방학 때만 되면 무척산기도원에 찾아가 꼭 삼 일씩 금식하며 기도하던 습관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명향식 선생님은 내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듯 기도의 맥을 짚어 주는 말씀을 전하셔서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가기만 하면 재미(?)가 있었는데, 어느 날 기도원에 올라가다 동행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재미있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그분은 한방으로 전도를 하는 장로님이었다.

우리 교회에 이런 분이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한 번 모시고 오라는 것이다. 진찰하고 약을 지어왔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약을 복용할 때마다 꼭 내가 기도를 하고 나서 약을 먹게 했다. 그것은 전도의 기회였고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하는 성령님의 역사였다.

약 한제를 다 먹기까지 열흘간 하루에 세 번을 그 집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놀랍게도 진통제 없이도 통증이 사라지면서 몸은 회복되었다. 그래서 그분이 어른 전도 제1호가 되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착공식 삽을 뜨고 있다. 어르신들이 교회당 착공식의 삽을 떴으니 동네에서 시비는 없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착공식 삽을 뜨고 있다. 어르신들이 교회당 착공식의 삽을 떴으니 동네에서 시비는 없었다.

 

그만 괴롭히세요

그해 여름 삼일교회 교사들이 여름성경학교 봉사를 나왔다. 천막이 미어터질 만큼이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천막을 더 큰 것으로 대체하던지 교회당을 짓든지 해야 했다. 나는 교회당을 지을 터를 보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동장가리 끝머리에 지으면 서장가리(현재 여전도회 회관이 있는 동네)가 바로 보이기 때문에 정말 적당한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은 동네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 나무가 있는 과수원 입구였기에 주인이 허락할 장소가 아니었다. 거기다 교회당을 지으면 과수원을 망칠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서도 욕을 얻어먹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마음에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과수원 주인에게 여기가 교회당을 지을 터라고 선언했다. 역시나 그는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분은 장년전도 1호가 된 척추암 환자분과 형제지간이었다.

한번 거절당했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리로 그 장소를 지날 때마다 거기 머물러 서서 교회당이 지어져 가는 것을 상상하며 기도를 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어느 날 서장가리에 전도를 갔다 돌아오는 나를 과수원에 있던 주인이 불렀다. 그리고 어렵게 말했다. “전도사님이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나는 날마다 괴로웠소. 이제는 내가 그만 괴롭고 싶소. 내가 봐도 교회당을 지을 터는 여기가 적소인데 교회가 되는 것을 보거나 내 동생의 병 고침을 볼 때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느껴지고 해서 내가 오늘 양심의 짐을 덜려하오. 당신이 원하는 곳에다 교회당을 지으시오. 땅을 얼마만큼을 주면 되겠소?”

나는 그다음 날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변에서 모래를 날라다가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 일에 주역이 되는 청년이 있었는데 박상목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국가축구대표선수 박상인의 동생이었다. 밤마다 경운기를 끌고나와 강변에 가서 모래를 퍼다 날랐다. 그리고 벽돌이 만들어지자 혼자서 교회당을 짓기 시작했다. 내 키 만금 벽돌을 쌓았을 때, 합천에서와같이 누군가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내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결국 혜성같이 나타난 그가 지붕 공사를 하고 사택을 마무리하는 일에 결정적인 일손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보내주셨다. 우리 둘째는 새로 지은 교회당 사택에서 태어났다.

아직 완공되지 못한 교회당이지만 입당감사 부흥회를 문동경 목사(당시 신대원3학년)가 강사로 섬겼다.
아직 완공되지 못한 교회당이지만 입당감사 부흥회를 문동경 목사(당시 신대원3학년)가 강사로 섬겼다.

 

천사를 만나다

19782월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자기는 전국 어느 곳이든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전도자 한 분이 찾아왔다. 전도지도 건전하고 이단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전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갑자기 몸살기가 있어서 그에게 수요일 저녁 예배 인도를 부탁하였고 그는 친근해진 교인의 집에 인도받아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사택에서 우리와 같이하고 그를 보내자니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자비량으로 다닌다고 말하지만, 여비는 주어야 하지 않는가? 전도지는 무엇으로 충당할 것인가? 더군다나 수요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였으니 뭐라도 드려야 하겠는데 돈이 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얼른 지갑을 열어 보았더니 천 원짜리 지폐가 다섯 장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어 봉투에 넣었다. 그랬더니 내 마음속에 "이 도적놈아 네가 더 많이 가지겠다 이 말이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원을 더 꺼내어 봉투에 넣었다. 그랬더니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려하나? 달랑 천 원짜리 두 장을 가지고?"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다. 다시 봉투에서 천원을 꺼내어 지갑에 넣었다. 그러니 "이 도적놈아"하고 지갑에서 천원을 꺼내어 봉투에 넣으면 "넌 어떻게 살라고?"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항의를 했다. "저더러 어찌 하라고 이러십니까? 공평하게 2,500원씩 나누면 좋겠는데 500원짜리 두 개는 없고 그렇다고 지폐를 반으로 자를 수도 없고 도대체 어찌하라고 이러십니까?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내게 질문하셨다. "네가 필요한 돈이 얼마이냐?" 그때 나는 신학교에 합격하였다는 통지서와 함께 입학금과 기숙사비 30만 원을 준비하여 납부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놓고 있었던 때였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입학금과 기숙사비, 30만 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그리 고민하느냐?"

"? ! !"

나는 얼른 3,000원을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 그 봉투를 건네면서 사례비이면서 여비라고 하였다. 그는 사례를 받으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극구 사양을 했다. 나는 정말 안 받으면 어찌하나 염려하면서 그냥 차비밖에 안 된다고 하면서 실은 부탁이 있어서 드리니 사양하지 말아 달라고 하였다.

그는 무엇이냐고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네 그것에 백배만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 저는 백배를 빌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만 배를 축복했지요. 만 배를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만 배가 필요 없습니다. 백배만 해 주십시오"

그는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기도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시골의 개척전도사가 얼마나 다급하고 필요하면 백배를 축복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봉투의 백배를 물질로 축복해 주시고 9900배는 영적으로 축복해 주옵소서."

아멘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정말 감사하였다.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떠나갔다. 그 이후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가 가고난 후 정확히 등록 마감일까지 25만원의 돈을 하나님이 주셨다. 물론 사람의 손을 통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5만원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채근하기를 "아버지 2500원씩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였을 뿐이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그에게 3000원을 주었고 그는 백배를 축복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5만원을 속히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한지 일주일이 지났을까 어떤 지인이 찾아왔다.

"전도사님!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네 무엇입니까?"

"제가 달 달이 4천 원씩 1년을 적금한 돈 5만원입니다"

나는 기절할 만큼이나 놀랐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정확하신 분이신가?

나 하나를 쓰시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리고 그것도 그냥 공짜로 주시는 일이 없었다. 심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개척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입에 응답을 받고 실행하셨고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셨다. 에스겔 36:37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한 말씀 그대로 나에게 보여 주셨다. ! 나는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나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삼일교회 교사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지원나왔다. 
삼일교회 교사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지원나왔다. 

 

교육전도사를 청빙하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부산의 후원자들은 약속대로 2년의 기간을 지나면서 슬슬 후원을 끊기 시작하였으나 교회는 점차 자립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셨다. 인근 초등학교 교장이 출석하게 되었고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장마면에서는 파출소장과 면서기가 주일이면 꼭꼭 예배에 출석하였다. 장마면에서는 장마제일교회가 유일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장마면 소재지에도 교회가 서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나를 붙들었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하고 있던 중 대학부 4학년 학생 중에 임지를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했더니 오겠다고 승낙했다. 당시 그는 아직 미혼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 뒤를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장마면에서 교인이 출석하면서부터 하나님은 슬슬 다음 개척지를 위해 작업을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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