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1

 

천헌옥 목사
천헌옥 목사

김신조 사건

불행하게도 나는 19681월 김신조 사건이 터진 1년 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마산 2 문창교회를 담임하시던 손명복 목사님이 입대를 앞둔 나에게 심방을 오셔서 여호수아 1장을 읽으시고 군 상황이 매우 엄중한 시기지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군 생활을 잘 마치고 오라는 권면의 말씀을 주셨다.

입대 전날 나는 교회당에 가서 밤을 새며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3년이 대학 3년이 되게 하옵소서.”였고 다음날 창원훈련소에 입대하였다. 다른 이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은 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여겼다. 훈련이 끝나가던 어느 날 훈련병들을 다 모으더니 시험지를 내밀었다. 역시 대학이니 학기말 시험은 치러야 하는가 싶었다.

시험관이 성적이 우수한 자는 좋은 부대에 간다고 하는 바람에 모두가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큐 테스트였다. 그해 논산, 창원훈련소 등 훈련을 받은 모든 훈련병들에게 일제히 치르는 시험이었고 성적순으로 뽑아 이름도 생소한 동해안방어사령부 창설요원으로 차출하는 것이었다.

우리 기수에는 1개 대대를 창설하는 400여 명의 요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는데, 다름 아닌 동해안을 철통같이 지키는 부대였다. 간첩선이 접선하면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하기에 아이큐 테스트를 해서 부대원을 뽑았다. 나는 행정병으로 갔기에 군수과 서기병이 되어 군대 3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새로 창설하는 부대였기에 서기병이 무엇을 어찌하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내려오는 공문에 따라 행할 뿐이었다. 그렇게 군대학 3년이 시작되었다.

우리 부대는 6개월마다 부대를 이동했어야 했다. 해안 초소에 나가서 6개월 근무한 뒤 정비와 훈련을 위해 후방부대에 들어가 6개월, 그런 식으로 3년 동안 부대 이사만 5번이나 했다.

어릴 때는 교사이신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수십 번 했었는데, 군대에서도 이사를 5번이나 하다니 하나님은 후일 개척교회를 하느라 주민등록등본 주소지가 2장에 걸치도록 수많은 이사를 할 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훈련을 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아들 입영하던 날'/ 대한기독사진가협회 박종욱 님 작품
'아들 입영하던 날'/ 대한기독사진가협회 박종욱 님 작품

 

졸지에 설교자가 되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병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가 양양 쪽으로 이동하여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 지역의 교회를 가게 되었다. 십여 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위로를 받으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단숨에 내달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얻어먹는 데는 너무나 익숙한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당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의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교회당이라는 것이 달랑 대여섯 평 남짓한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것도 지붕을 새로 덮지 않아서 군데군데 움푹움푹 패인 것이 썩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비가 오면 틀림없이 집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한 감리회 광정교회라는 교회 간판만이 그것이 교회라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었다.

11시 장년예배에 모인 성도들이라고는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우리 군인이 세 사람이고 일반 성도가 세 사람이었다. 그것도 다 늙은 할머니 한 분과 아주머니 두 분이 전부였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는 눈치였는데 오히려 우리에게서 위로를 받고자 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11시가 다 되었는데도 예배를 인도할 목사님은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기도하며 눈치만 보다가 할 수 없이 물어보았다.

목사님이 안 계신가요?” 그들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전도사님은 계세요?” 그들은 역시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럼 예배는 누가 인도해요?” 그제야 그들은 입을 열어 대답하기를

군인 아저씨들이 해야지요하면서 턱으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응당히 해야 할 사람들이 왜 묻느냐는 표정들이었다.

그제야 그들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였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꼬. 군인 셋 중에 그래도 내가 오래된 신자였고 주일학교 반사라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졸지에 내가 예배인도자가 되어 버렸다. 설교를 들으러 갔던 내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게 되었다. 아무 준비도 없는 나에게 예배를 맡기는 것은 고문 중의 고문이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성경을 찾아볼 겨를도 없이 강대상에 섰다. 대충 보던 대로 묵도하고 찬송하고 사도신경을 한 뒤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기도를 시켰다. 대체로 할머니는 기도를 오래 하니까 성경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할머니의 기도는 너무 짧아 나는 그냥 앉았다가 바로 일어서야 했다.

하나님 아부지 참말로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군인들이 떠난다고 썹썹했는디 오늘 새로 군인 세 사람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세우신 종을 붙들어 말씀을 주시고 성령이 충만하게 해 주시기 빕니다. 이 교회를 주의 손에 꼭 붙잡아 주시고 마구(마귀) 새끼들은 성령의 대포로 꽝 - 쏴서 다 물리쳐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대개 그런 내용의 1분도 채 안 되는 기도였다. 할머니는 6.25 전쟁이 났을 때 피난도 가지 않고 교회를 지켰단다. 그러면서 대포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기도는 전투적이었다.

그런데 대포로 꽝 - 하는 부분에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쑥 내려 꺼지는 것같이 다 물러가 버리고 용기가 솟아났다. 비록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무조건 요한복음을 1장을 펴라고 했다. 1절에서부터 읽다가 와 닫는 말씀이 있으면 전하기로 생각하고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12절에 와서 내 눈이 머물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그래서 얼른 제목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정했다. 그리고 내 입에 주시는 대로 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1)죄를 이기는 권세를 가진다. (2)사탄을 이기는 권세를 가진다. (3)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가진다.” 나도 모르게 그런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둥지둥 예배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왔다.

달빛이 조요한 밤 모래 언덕 뒤에 우리 셋은 특공대원들처럼 한 사람씩 빠져나와 모여들었다. 취침 시간에 모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당회(?)를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모임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그날 회의의 주제는 장년 예배는 누가 인도를 할 것인가, 주일학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찬송 인도는 누가 할 것인가 이었다.

주일 설교가 합격이었던지 만장일치로 장년예배 인도는 내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서 병장이 주일학교를, 박 상병이 찬송인도를 맡았다. 우리들의 당회는 참으로 은혜롭게 끝났다.

기적이었다. 2월에 그 교회에 첫발을 디뎌 이제 5월이 되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였다. 그 산골 마을에서 장년이 15, 6, 주일학생은 30여 명으로 불어난 것이었다. 우리 앞서 있었던 부대에서는 군종 하사관이 있어서 이 교회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신학을 하다가 입대한 유능한 전도사였고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평신도에 불과하였다.

55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전 교인이 봄 소풍을 갔다. 우리 군인도 5명이나 갔고 주일학생이 30여 명 장년이 20여 명이었으니 그것만 해도 대 부대와 같아 보였다. 나는 그들을 한자리에 앉히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어느새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있었다.

참으로 모든 것이 은혜로 왔고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깐이었다. 6월이 되면서 우리는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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