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자전 에세이, 이끌려 살아 온 세월/2

 

그날은 주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로 이지 못해 군데군데 썩어 움푹 팬 지붕으로 빗물은 여지없이 스며들어 바로 예배당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은 떨어지는 썩은 빗물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지붕에 얹어 놓았던 흙도 함께 떨어지는 것이었다.

예배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예배당 마루는 썩은 빗물과 함께 떨어진 흙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죽어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전쟁 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빗물을 다 뒤집어쓰신 채로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야 좋을지 몰랐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 얼렁뚱땅하고는 얼른 주기도문을 외우고는 종을 쳤다.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배를 마쳤다고 몇 번 이야기하는데도 할머니는 일어날 줄을 모르고 엎드려 우는 것이었다. 나는 강단에 선 채로 고스란히 비 세례를 받았으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 울고 있었다. 머리에서 빗물이 타고 내리므로 빗물 같아 보였지만 뜨거운 액체가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른 두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보니 모든 성도들이 다 울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바람에 온 교회가 울음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흙더미가 떨어져 내린 천장은 흉물로 변해 있었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 것인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두가 버리고 간 패전지였다. 6.25 전쟁 이후 그렇게 버려져 간판만 걸려있던 교회,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버려진 땅에 아무 힘도 없는 우리들은 그렇게 망연자실 서 있었다.

비가 그친 그다음 날 밤 우리는 다시 그 모래 언덕 뒤에 모였다. 당회를 하기 위하여서였다. 그러나 그날 밤은 이전과 같이 은혜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모두가 근심 어린 한숨만 쉴 뿐 아무런 의견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말머리를 찾은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자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저들을 버리고 시내로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것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토론은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군인, 그것도 졸병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두고 기도하자고 하고는 회의를 마쳤다.

당시 함께 했던 동지들, 사진 아래 왼쪽이 필자, 그 오른쪽이 서정길(현재 통합목사로 미국에 거주) 위 오른쪽 이억집 감리교 목사, 위 좌쪽은 박점기 병장(월남전 참전 후 소식두절)
당시 함께 했던 동지들, 사진 아래 왼쪽이 필자, 그 오른쪽이 서정길(현재 통합목사로 미국에 거주) 위 오른쪽 이억집 감리교 목사, 위 좌쪽은 박점기 병장(월남전 참전 후 소식두절)

 

그다음 주일 예배를 인도하던 나는 갑자기 교인들을 향하여 기도하자고 소리를 치면서 이번 한 주간 새벽에 다 나와서 엎드리자고 외쳤다. 그것은 성령의 음성이었다. 아무도 거역하지 못했다. 우리는 새벽에 교회에 갈 것을 걱정하며 십여 리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빳다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는 눈치들이었다.

모자라는 잠들을 물리치고 430분에 하나씩 일어나 개구멍을 통해 교회를 향해 달렸다. 엄밀히 말하면 부대 이탈, 탈영이나 마찬가지인 위험한 도박이었다. 정각 5시 잠깐 예배를 드리고 30여 분 기도하고 다시 속보 반 구보 반으로 부대에 도착하여 아침 점호를 받는 것이었다. 첫날은 무사하였다.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지키심은 그 날뿐이었다.

그다음 날 들통이 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찔러 바친 것이었다. 우리는 매를 맞으면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쉬지 않았던 제자들처럼 각오를 단단히 하고 본부중대장 앞에 갔다.

중대장님은 학군단 출신이어서 합리적인 분이셨다. 나더러 변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들 드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참으로 소상하게 마치 형님에게 이야기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이어져갔다. 그것은 내가 나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이 나를 변호하시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중대장님은 대단히 감동되어 있었다. 그는 불신자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부하들이 장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셨든지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셨다.

진작 내게 이야기를 하지. 그러면 오해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우리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너희들이 자기의 할 일을 충실히 다 하고 그런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야. 민간인에게도 군대가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니 장려할 일이지. 아무 사고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서 하도록 해 부대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알았나?”

그것은 전화위복이었다. 참으로 잘 된 것이었다. 누가 찔러도 참 잘 찌른 것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우리는 당당히 정문을 통하여 새벽기도회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새벽기도회는 주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웃지 못할 일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부대 안에서도 목사로 통하게 되었고 별명은 [새벽기도]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 후에도 아침 점호에 내가 화장실에 앉아있어 조금 늦는 일이 있을 때에도 천 병장은 새벽기도 갔습니다.’ 하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도들도 참으로 진지하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결론을 얻었다. 드디어 주일예배 설교에서 하나님의 전을 이렇게 방치해 온 우리들의 죄를 회개하자고 외치고는 지금 새마을 운동도 하는데, 우리 교회도 지붕을 개량하자고 선언하였다. 다음 주일에 헌금을 작정하겠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거의 교회에 다 나오다시피 하니까 동네 어른들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핍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동네 맨 윗집에 사는 주일학생이 교회에 다닌다고 그 엄마가 매우 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방을 하였다. 토요일 오후 서 병장과 같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방문하였지만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하게 되었다.

맥없이 돌아오는데 뒤에서 청량음료 같은 반가운 목소리로 선생님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우리 교회 주일학생이었다. “그래 네 집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오는데 성령님은 나를 자꾸 재촉하시는 것이 아닌가. “가 보라는 것이었다. “서 병장 한번 들렀다 가자그러고는 그 집으로 갔더니 의외로 그 부모님들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아이들을 잘 가르쳐 주셔서 우리가 감사합니다.”

십여 리를 걸어와 헛걸음하는 우리를 주님은 그렇게 위로하여 주셨다. 그러나 그것만의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있다가 그만 저녁 식사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이제는 부대에 들어가도 저녁을 얻어먹기는 글렀고 꼼짝없이 굶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어머니가 저녁을 주겠다고 간곡히 말하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위로의 손길을 깨달으면서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깊은 고민을 듣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었다. 고향에서는 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전쟁이 터져 홀로 남으로 오게 되었단다. 휴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38선이 그어지고 돌아갈 길이 없어 홀로 낙오하고 말았다.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 살면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 십수 년이 지나고 마흔이 넘어서야 남쪽 처녀를 맞아 결혼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그는 중혼을 하였다는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뵐 낯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위로해 주었다.

“6.25와 같은 전쟁으로 인하여 박 선생님과 같이 된 분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이것은 전혀 박 선생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전쟁의 고통입니다. 하나님도 다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오히려 박 선생님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위해 충성할 때 하나님이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신학을 몰랐던 때임으로 인간적으로 그를 위로하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죄인이다 하면서 교회밖에 있는 것보다는 주 앞으로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삶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다리겠노라 하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당시에 나는 교회와 목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목회자같이 일하였고 성령님은 그런 나를 목회자같이 붙들고 일하셨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셨다.

어느 날인가 우리 부대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중 나는 특식을 먹게 되었다. 그 특식은 다름 아닌 제법 큰 우렁이이었다. 그날의 메뉴는 된장국이었는데 누가 잡았는지 우렁이 하나를 국솥에 던진 것이 내게로 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별미가 내 국에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식당에 있는 동기들에게 말하였더니 우와 하면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선택된 것 같아 하나님께 감사한 후 맛있게 국을 먹고 그날이 수요일이라 바로 교회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 십 분을 걸었을까 갑자기 배가 뒤틀리며 아파 오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에 도착했으나 꼼짝할 수 없이 되었다. 주일학교를 하는 동안 교인의 집에 드러눕고 말았다. 진땀이 나기 시작하였고 정신도 혼미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저녁에 먹은 그 특식이라는 우렁이가 농약에 오염되었던 것이었고 그것을 먹었으니 식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이대로는 예배를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더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기도했다.

주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예배는 어찌합니까? 죽더라도 오늘 저녁 예배만이라도 인도하게 해 주십시오그러다가 급기야는 주여! 그럼 딱 한 시간만이라도 강단에 서게 해 주세요. 그럼 주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기도하였다.

천 병장! 예배 시간이야.” 서 병장이 깨우러 왔을 때 나는 눈을 떴다. 기도하다가 깜빡 졸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아픈 고통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정신도 말짱하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고통이 올까 봐 계속 감사를 되뇌면서 강단에 올라갔다. 한 시간의 예배를 은혜롭게 인도하고 부대로 돌아오는데 신기하게도 다시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기도대로 주님은 딱 한 시간만 나를 고통에서 놓아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증거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아프다는 것이 감사하였다. 그것은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의 증거이기에 감사하고 오히려 기뻤다. 아픈 것이 그렇게 기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밤을 온통 흐르는 땀과 고통 속에서 감사하며 지냈고 새벽녘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는데 한낮이 되어서야 잠이 깨었다. 신기하게도 말짱하게 나아 있었다. 주님의 손은 그렇게 나를 붙들고 계셨다.

이제 헌금을 작정하는 주일이 되었다. 누가 얼마를 할 것인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새 신자들과 군인들 몇 사람이 헌금을 하면 얼마나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작정한 헌금을 계수하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 헌금은 지붕을 개량하고도 남을 정도의 많은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다시 은혜의 분위기가 충만하였다. 저녁 어린이 예배를 인도하는 서 병장은 벌써 들 떠 있었다. 찬송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신이 나 있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한 것이리라. 그때였다. 뒤에 앉아있던 나는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안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박 선생이었다. 급히 뛰어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박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나는 그를 조금 억지로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같이 기뻤고, 용기백배하였다. 이제 지붕을 개량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박 선생은 웬만한 집은 혼자서도 지어내는 목수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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