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우 목사[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김학우 목사[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대로마제국에 맞서 투쟁과 타협하며 살다 간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역사는 다시 쓰였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파스칼의 말과 같이 그녀는 세계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은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 년 동안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2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 살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미와 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나일강의 마녀로 불리는 그녀는 기원전 6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 사후 그녀가 열다섯 살 때 불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연하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함께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쟁에서 죽은 뒤 그녀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세 남자와 재혼하였는데 그 유명한 시저와 안토니우스 시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과도 재혼하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가장 먼저 당대 가장 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던 율리우스 시저를 그의 정치적 대부로 생각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저의 연인이 되어 아들까지 낳고 야망을 키웠지만 예기치 않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기원전 44년 시저는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었습니다. 시저의 사후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시저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양분체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두 세력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이집트를 위해 안토니우스를 택했습니다.

삼두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로마제국 동부지역 사령관으로 동방 원정길에 오를 때에 그녀는 자신과 조국을 위해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안토니우스 또한 시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그녀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동방의 통치권까지 넘겨주었으며 심지어 안토니우스는 악티움해전 때 조국을 버리고 클레오파트라 편에 서서 조국의 사령관인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길을 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조국을 버리고 한 여인을 선택한 로마의 영웅, 한 여인을 위해 조국과 싸운 안토니우스의 선택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상대로 악티움해전을 일으킨 이유를 이같이 적고 있습니다.

로마인이 한낱 이집트 여인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한다면 조상을 뵐 낯이 없을 것이며 우리가 여인의 수중에서 농락당한다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림: 김학우 목사[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편집.
그림: 김학우 목사[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편집.

찰턴 헤스턴이 감독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영화에서 그녀의 최후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장식한 후 독뱀이 그녀의 가슴을 물게 하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해 처음 기록된 이래 셰익스피어 등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의해 거의 정설처럼 자리 잡혔습니다. 죽음의 진위와 상관없이 이로써 이집트의 장구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영웅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지만 끝내 야망을 펼쳐보지 못하고 불과 39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안토니우스 또한 그녀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입니다. “그땐 내가 철부지였지, 판단도 미숙했고.” 그녀와 만났던 영웅들,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포함하여 많은 남자들이 한결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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