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우 목사 [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김학우 목사 [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

영국에서 박해받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을 청교도라 말합니다. 반면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아 유럽을 중심으로 흩어진 개신교도를 위그노라 말합니다. 위그노의 이주가 역사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 신념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이자 엔지니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도인 위그노들 대부분은 젊은 지식인들이 주류였으며, 그들은 투철한 신앙과 직업의식과 함께 상공업을 중시한 덕분에 일찌감치 제철, 염료, 화학, 정밀기계 등, 첨단 기술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들은 대략 65,000여 명으로 200여 명 개신교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네덜란드는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과 함께 추방된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여 무역, 금융, 해운, 보석가공업 등을 발전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위그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독일과 같이 프랑스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까지 제공하여 위그노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습니다. 네덜란드는 해양 기술을 가진 위그노들이 몰려들자 날개를 단 듯 무역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제치고 17세기 동방 무역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하였습니다.

나아가 1687년 네덜란드가 속령인 남아프리카로 이주민을 정착시킬 때에 위그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각종 산업은 물론 특히 포도 재배를 통해 정착하였으며 오늘의 남아공 와인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림 / 김학우 목사 편집
그림 / 김학우 목사 편집

무엇보다 위그노들의 결정적인 영향력은 영국에서 나타났습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하는 동안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집단 이주하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찰스 2세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위그노를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어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베르사유 가구 제작자, 방직업자, 은세공업자, 기계 제작자, 시계공, 실크 디자이너 등 많은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습니다. 영국은 위그노들이 가진 증기기관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식민지 개척을 하였지만, 자본축적에만 몰두한 데 비해, 영국은 위그노들이 가진 신앙을 존중하며 그들이 가진 기술을 축적하여 산업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영국이 세계 패권을 잡게 된 배후에 위그노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유럽 곳곳에 흩어진 위그노들 덕분에 당시 기술 후진국이었던 독일은 프랑스를 추월하여 기술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네덜란드는 무역 강국을 이루었고 스위스는 시계와 금융 산업 등 근대공업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물리학자였던 데니스 파핀은 “17세기 후반 영국에 건너와 증기 엔진과 면방직, 산업 등 각종 기술을 발전시키고 발명한 사람들은 위그노였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저술가 아푸아 허시 또한 런던의 은행을 발전시킨 주역이 위그노들이었다.”라며 오늘날 영국이 브렉시트로 다른 민족과 국가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영국의 미래의 위험 요소라고 지적하며 과거 영국이 위그노들을 수용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세계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식하여 투철한 직업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그노들의 신앙과 직업의식은 전 세계 곳곳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