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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윤교수는 기독교 은혜 언약을 흔들고 있다. ]
강종수 2016-06-17 19:08:02 | 조회: 2876
[ 김세윤교수는 기독교 은혜 언약을 흔들고 있다. ]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부담을 느낀다. / 강종수 목사


코닷 홈> 주장과 논문>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9835
특별 인터뷰: 칭의론 논쟁, 김세윤 교수에게 듣는다
칭의의 완성은 마지막 그 날에 예약(reservation) 되었다


[본문 내용 발췌]와 비판

1) [바울 서신들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행위대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얼마나 자주 반복됩니까?]

비판/ 행위대로의 최후 심판을 말하자면 계시록에 최후 심판이라고 봐야 할 백보좌의 심판이 있습니다.
계20:11-12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심판자는 누구인지 해석의 차이는 있습니다.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하셨고(요5:22) 재림하신 주는 심판주로 오신 모습에서(계19:11) 성자 예수님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계시록상 계4:2 이하에서부터 줄곧 성부 하나님이시고, 알파와 오메가의 표현도 하나님에 대한 형용이므로(계1:8, 강종수, ‘요한계시록 주해’, 계1:8 해석 참조) 최후 심판대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박윤선, 계시록주석, p.337).

성부와 성자 간의 표현과 권한에는 엄격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일 것으로 봅니다(이상근, 요한계시록 주해, p.235).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도 합니다(헹스텐베르그; 이순한, 신약원어 주해, 디도서-요한계시록, p.255).

심판자를 성부 혹은 성자로 이해하는 문제는 최후 심판의 내용을 해석하려는 데는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12절에서 심판의 책 두 권이 나오는데, 하나는 복수 형태로 나오는 책들과 단수로 책이 나옵니다.

책들(βιβλία)은 본절 대로 죽은 자(불신자가 영원한 지옥으로 가기 위해 살아나서 심판대 앞에 선 상태), 즉 불신자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복수 형태로 된 것으로 보이며 생명책(βιβλίον)은 구원 얻는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행위가 기록된 책의 뉘앙스가 없습니다.

2)[(already inaugurated), 그러나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but not yet consummated) -- 줄여서 ‘already – but not yet’)의 구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즉 하나님 나라의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보‘라는 말을 ’예약‘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판/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개념과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효력을 대비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 언약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죽는 날까지 소망과 하나님 나라의 증거생활과 교회공동체적인 하나님 왕국의 문화적 표현의 진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갈 때 칭의가 유보되었다거나 구원의 완성이 예약되었다는 등의 이해는 구원의 언약적 본질을 모르고 여전히 구원을 이루려는 신자들이 신에게 만족한 종교적 도리를 근심하는 일반적인 종교심이라 여깁니다.

김세윤교수에게 복음적 성구를 각성시키고 싶은 구절은,
요6:28-29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잘 아실 것이라 봅니다.
이 구절을 복음적으로든 개혁주의로든 보편적인 주석으로 보신다면 지금 계속되는 칭의의 유보적 뉘앙스로 주장하는 본심에 대한 답이 되리라 여깁니다.

부모의 사랑이든 세속적 사랑이라도 추상 용어 중에 가장 존귀한 사랑의 단어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감명 받는 것은 더더욱 논리로 형용하기엔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체험으로 그 사랑을 받는 것이지 사랑 받는 쪽에서 무슨 몸짓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들의 심리적 정서라 여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다가 좌절한 것을 심리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가 가족적으로 사랑을 입지 못한 자였을까 합니다.


3) [그러면 당신들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 (구원의 완성)을 이미 받고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요?“ 아마 구원파도 그런 허황된 주장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한 “실현된 종말론”’ 에 근거한 주장은 아마 극단의 신비주의 이단자들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비판/ 성경상 영생은 완전한 구원, 곧 몸의 부활을 입기 전에 이미 이 땅에서 주의 재림 이전에, 아니 자신이 죽기도 전에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이미’의 크로노스에 해당되겠지요?

구원파의 교리는 처음부터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단적 복음의 해석으로 칭의에 대한 바른 해석을 지닌 정통신학의 구원론과 연관 짓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록 구원을 얻었다면서 신앙생활에 신자의 생활 본분을 망각하고 전혀 복음의 효력을 보이지 않는 이들에 맞서 칭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혹시 바른 가르침을 받은 신자가 마치 칭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처럼 세속적 언행을 보이더라도 그들 역시 바른 교사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면 칭의의 은혜를 들을 때는 구원파가 말하는 구원론(구원 얻은 후 범죄에 대한 무지)을 들었던 자들도 아니고 그렇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라도 성령 충만하여 교회 창설을 하는 중에도 베드로 같은 경우 유대주의적 사고의 잔여로 그의 신앙 행보가 옳지 않아 바울사도로부터 꾸지람을 공적으로 받게 되는 경우가 있었지요? 사도도 꾸지람을 받지만 바울이 그의 칭의 완성을 걱정해서 말한 바가 아닙니다.
갈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아시다시피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도리와 시대적 가치로(그 기준도 애매하지만) 불의함보다 식견이든 신앙심이든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해 불신하거나 오해케 하는 복음의 곡해로 교시하면 믿음이 초보인 연약한 자를 미혹하게 되고 그 영혼을 낙망케 하는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동의하시지요?

어쩌면 부도덕한 행위로 교회의 불의를 드러낸 것보다 베드로가 유대주의적 사고의 잔여로 복음을 오해케 하는 범죄는 근본적으로 더 큰 위험을 낳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도덕적 문제는 그에 속한 문화적 요소였고 더 큰 문제는 이신칭의의 재현이었습니다. 중세기의 도덕적 타락을 바로 세우려는 도덕 선생으로 루터와 칼빈이 사용되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영생 구원은 중생한 영혼의 실존적 감각으로 이미 영생은 주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아래 구절에서 이미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상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가졌고, ἔχει 현재,능동태,직설법)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1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가졌고, ἔχει 현재,능동태,직설법)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4)[우리 말 어감이 가져오는 상이한 뉘앙쓰를 살려 말하자면, ‘예약’ 되어 있기에 지금은 그것을 소망하며, ‘유보’되어 있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완성을 위하여 ‘믿음의 순종’ (롬 1:5; 16:25) 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 2:12-13). ]

비판/ 구원이 예약되었고 유보되어 두렵고 떨림으로 완성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결국 안식교 교리 식으로 말해, 소위 조사 심판을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그리고 빌 2:12-13도 정통적인 주석이 필요하겠지요. 신학의 기초는 성경의 해석에 근저 해야 하고 당연히 성경적으로 비판되어야 하니까요.

빌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구원을 그러면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지 예사롭게 받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인 사람으로서 어른의 말씀을 듣는 태도에도 조신하게 해야죠.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자율주의(自律主義)적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지켜나갈 태도를 권면하는 표현이지 지금 김교수가 주장하는 칭의 완성을 위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으로 주의 뜻을 좇는 일에 있어서 경건과 두려움으로 지킬 생각을 다하여야 당연하되 이 두려움은 노예적인 공포심이 아니지요(이상근,옥중서신 p.108).


5)[제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자세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학의 전통이 ‘구원의 서정’의 틀을 설정하고 ‘칭의’에 (논리적 또는 시간적으로) 이어서 ‘성화’를 거쳐 ‘영화’, 곧 구원의 완성에 도달한다고 가르친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유보’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판/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주로 루터나 칼빈의 신학에 근거하나 개혁신학자들이 당한 시대적 언어나 강조점이 다릅니다. 중세 개혁 그 후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더 발전되어져 왔지요. 다만 구원 서정적 순서에, 거듭남을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듯이 구원을 위한 유효하고 완전한 사건은 일어났지만 신비한 영적 역사를 합리적으로 풀어내는 데는 어렴이 있을 따름이지요. 그러니까 칭의의 유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정통신학에는 없습니다.

중생-회개-믿음의 구원서정을 풀어 놓을 때에도 루터는 믿음을 앞에 두었고 웨슬레는 회개를 칼빈은 중생을 앞에 둔 것들은 성경관에 있어 개인적 인식의 동기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으로 해석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완성을 위한 구원의 서정을 설정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배속에서 자라 때가 되어 태어납니다. 태어나긴 했는데 거듭 태어났다는 것을 중생이라 하지요? 그러니까 질적 출생이 다를 뿐 사건적 발생으로 출생은 단회적입니다. 이미 중생한 영혼들이지요. 그런데 왜 구원을 위해 인의(人意)로 또 얼마만큼의 의(義)를 쌓아야 하겠어요? 오직 성장만 남았지요. 이를 성화적 삶에서 설명되어야 하지요.

엄격히 말해 불신자들은 아무리 거룩한 삶, 김교수께서 주장하시려는 어떤 내용들의 삶을 아무리 살아낸다 해도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영혼은(엡2:1) 생명의 도를 살아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다 행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를 살아야 칭의에 대한 선언이 하나님으로서 만족하시겠어요?


6)[칭의’는 ...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재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하는 것, 즉 그의 대행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의인’으로 살기, 즉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판/ 내용은 줄곧 꼭 같은 주장들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의의 열매, 즉 성도다움의 행위로 칭의를 완성해야 한다는 칭의의 정의는 옳지 않습니다. 칭의의 신학적 정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심이지요.
하나님께서 언제 내 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했으니 잘 믿는가 보자 하시고 우리를 조사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은혜 언약을 신뢰하므로 선언된 의인입니다. 성경적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고 의인(義人)으로 표현하나 오히려 의인인(義認人)으로 납득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7)[곳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것을 상기시키며 (예: 롬 14:10; 고후 5:10; 살전 3:12-13),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 (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 (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 (고전 10:12) 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촉구합니다 (빌 2:12).]

비판/ 성도의 거룩한, 구별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내기는 완전할 수는 없으나 성경적 교훈의 삶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지요. 그런데 김교수께서 선택하시는 구절들은 그야말로 경거망동하여, 잘못 배운 가운데서 교회 다니는 종교인들 수준에게 꾸짖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되겠지만 적어도 공교회가 신앙하는 칭의의 근본을 흔들어버리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에는 특히 주경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줄 압니다.

‘넘어지다, 두렵고, 떨림’ 이런 저런 공포스럽게 보이는 구절들과 단어는 하나님 은혜의 사랑 안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감동 받으면 그 경고들이 오히려 타당하고 아버지의 아름답고 완전하신 입술로 들려질 뿐 부담가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중학교 때 예수를 먼저 믿었고 저는 고교 졸업 후 예수를 믿었는데 나중 제가 예수 믿은 후 친구에게 전도를 하다가 예수의 재림과 심판, 계시록 이야기가 나오니까, 계시록 보면 엄청 무섭다는 겁니다.
왜 무섭습니까? 안 믿고 예수 기다리는 맘이 없으니까, 심판이 두려우니까, 은혜 안에 못 들어 왔으니까 두려운 거죠. 그는 20대 후반, 저가 예수 믿고 신학하러 고향을 떠난 당시 이란에 직장으로 갔다 병을 얻어 귀국한 후 고치지 못하고 죽기까지 알라신 우상을 쥐고 주문 외우다 죽고 말았답니다. 예수는 불신이었지요. 그러니까 예수 재림이 무섭다고 했나봐요.


8)[그저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킨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기뻐하고 안주하려는 사람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때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마 7:21-23).]

비판/ 믿음의 은혜 언약을 받되 회개가 없고 도식적 이해를 주입하여 온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주의로 변질된 것은 가슴 아픈 역사이고 어떻게 교정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는데, 주범은 삼박자 축복이니 하는 자와 그 뒤 긍정주의로 교회를 무슨 축복 생산 공장같이 만든 목사들입니다.

그렇다고 교수께서는 자꾸 ‘싸구려 은혜’,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는데 이런 어투는 참 듣기 불편합니다. 은혜 언약을 가볍게 여긴다든가 하는 표현으로 바꿔 주세요. 물론 은혜 언약 자체를 그리 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는 자들에게 꾸짖는 표현이지만 괜히 엉뚱하게 복음 자체가 그 형용사를 받아 어휘적 환난을 받는 것 같거든요.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가 디트로이트(Detroit, 1920년대)에서 자동차 산업의 붐 속에 노동자들이 받는 고통을 대변하려고 노조를 조직하는데 힘쓴다든가 글로써 비판하며 나름 문화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윤리신학자로 오히려 비판받게 되었는데, 우리는 각자의 소양대로 시대적 소명을 다해야 하나 한국교회의 난류를 바로 잡기 위해 수고할 때 칭의에 대한 윤리적 보수보다 복음의 본래적 의도를 바로 잡아 줘야 한다고 봅니다.

빠르게는 70년대 후반부터 사회의 물질적 부흥과 80년대 들어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 교회는 맘몬 사상에 맛들여지고 외형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이에 잃어버린 것 중에 구원의 진귀한 은혜의 언약을 그야말로 가볍게 여겨 경건히 수용할 줄 모르고 세속화 되어버린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근본을 잊고 살아가는 자식이라고 해서 그의 도리를 보고 내칠 수야 없잖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해 다시 들려주고 힘으로도 능으로도 도덕으로도 안 되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변치 않으신 사랑과 복음의 중심에 있는 독생자의 보혈 은혜, 그 희생적 가치를 통한 칭의의 은혜를 왜 도덕과 윤리로 수납하려는 겁니까?

도덕적인 인간도 윤리적인 인간도 구원을 얻기에는 우리 속에 의가 없잖습니까? 처음도 은혜, 나중도 주님의 보혈을 힙 입고 눈물로 통회하며 나아가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성도들에게 자꾸 조사심판하실 아버지로 가르치지 마세요.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는 그런 무서운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끝까지 부르시고 또 아들 죽이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그렇게 주님을 붙들라 하셨고 또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 아멘.
2016-06-17 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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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coram | 2016-06-21 10:51:41 삭제

예 이상엽 장로님 말씀대로 미리교회포럼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엽 | 2016-06-19 20:56:57 삭제

고신측 목사님, 신학교수님들이 다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 주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이런 자리에 평신도도 참여하여 평신도 입장에서 궁금한 것을 허심탄회하게 묻고 의견을 나누고 말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김세윤 교수의 주장(옳은 생활로 적합해야 구원이 완성된다?)과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 구원받았으면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 아니냐는 말, 그리고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완성하라)는 의미와 다른 건가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과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살아가는 것, 즉 양 극단의 중간이 과연 어딘가요?

강종수 | 2016-06-18 18:18:21 삭제

기독 2년간 엄청난 해석 논란이 이어져 왔습니다.
중세기에서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물질주의 기복신앙(3박자 구원?)과
긍정주의 비복음으로 인해 성도들이 혼란 중에 있습니다.

이것을 정통신학자들이 바로 잡지 않으면 어느새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유럽교회의 인본화로 추락상태입니다. 한국교회는 윤리문제뿐 아닙니다.
이런 본질적인 정통적 칭의론을 흔드는 자를 쫓아내야 합니다.
명성 있는 신학자라고 옳은 도리를 가르친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시대마다 시험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김세윤교수는 그렇다고 복음주의도 아니고
구원론에 심각한 은혜언약을 흔들고 있습니다.
늘 믿고 있던 이신칭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김세윤교수의 해석은 반박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잘못 들으면 낙망하는 소립니다.

소위 알미니안주의-사람의 의지로 구원얻는 것,
옳은 생활로 적합해야 구원 완성이 된다고 하잖습니까?
이것이 복음이겠습니까?
의롭지 못한 삶을 고친다는 것과 구원이 의로워야 완성된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뜻입니다.

이상엽 | 2016-06-18 17:59:19 삭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딤후 1:15),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이런 구절을 보면서, 굳이 왜 이런 구절을 넣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해피엔딩스토리 같으면, 떠났다가 다시 반성하고 결국은 함께 했다로 마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사실 오늘날 대다수가 한번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이 설마 나를 버리겠나? .언젠가는 회심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알곡과 쭉정이의 존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 뿐 아니라 교회 안도 마찬가지로 압니다.
누구는 아무리 서운할 정도의 경고를 받아도 도전을 주어 감사할 것이지만, 누구는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얘기하면 엄청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알곡을 위해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는 김세윤 교수님의 설명은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신칭의를 두고 해석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면, 과연 각자가 섬기는 하나님이 과연 같을까?라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는 있지만, 치열하게 논쟁하며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건가?
더 심각한 저의 질문은 이게 이렇게 중요한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헷갈려 할까?
하나님이 과연 헷갈리게 말씀하셨는가? 거치는 돌처럼 일부러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의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날마다 져야 할 오늘날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좁은 길은 무엇일까라는 고민도 있습니다.
성경은 다수결이 아닌 건 분명하니 잘 따라가야 할텐데 목사님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다면 일반 성도는 더 혼란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고민하는 게 은혜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마음을 건드리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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