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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해설] "견고한 영생"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 (성도의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잠정적인가?)
PAUL 2018-05-08 01:43:21 | 조회: 515
"견고한 영생"(요 10:26-28)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한 번의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잠정적인 것인가?)


[본문말씀]

“너희가 내양이 아니하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6-28)

인간은 오염된 오성(understanding)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가지고 있는 어느 정도의 판단력의 주체인 이성(reason)마저도 뒤틀어짐으로 소위 플라톤(Plato)이 말하는 “동굴의 우상”(the idols of the den)이나, 특히 베이컨(Bacon)이 말하는 “우상과 허구의 관념”(the notions of idols and false)에서 보듯, 불량으로 뒤틀어진 거울과 같이 경직된 성당 안의 뒤틀린 "NAVE"에 매몰되어 있는 외골수의 선입관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한,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The idols and false notions which nave already preoccupied the human understanding, and are deeply rooted in it, not only so best men's minds that they become difficult of access, but even when access is obtained will again meet ant trouble us in the instauration of the science, unless mankind when forewarned guard themselves with all possible care against them(Francis Bacon, "the notions of idols and false").

기성신학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된 주장을 보면 오로지 자신들만이 "성경적"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고 본다. 사실, 이것은 엄청난 교만이다. 건전한 신학의 역사성(historicity), 전통성(tradition), 사회성(sociality), 전문성(speciality)등의 학문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수천 년을 거쳐 오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들을 받은 수많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 주의 종들을 통하여 역사상으로 교회의 권위 있는 공회에서 선별되고 검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지식이 축적된 학문이 오늘날 건전한 정통신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목회신학연구원]에서 10여년 이상 필자의 강의를 듣던 목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수한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와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공부한 매우 특출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박사로, 필자가 좋아하는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목사님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수용하면서도 칼빈에 대한 거부감으로 칼빈을 거론하지 않았는데도 미리 알미니안이 맞다고 하며, 칼빈의 “칼”자 소리만 들어도 펄쩍펄쩍 뛰며 흥분하는 것을 보고 필자를 비롯한 동료 목사님들이 매우 안타까워한적이 있었다. 물론, 신학은 자유이지만, 우리가 믿고 따르는 개혁신학에서 거리가 멀어진 사실을 못내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분은 신학은 무조건 무시하고 말끝마다 "성경적으로"만을 외치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머리속의 NAVE에는 다른 선입관념이 들어가 자리잡고 있어서 자신만이 "성경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필자가 원하는 바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념을 내려놓고 성경본문(the text of the Scriptures)에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 혹자의 글에서는 무조건 칼빈에 대한 거부감으로 칼빈이 주장한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대하여 절대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물론 필자는 칼빈의 모든 것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칼빈의 주석은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참고가 되지 않는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를 통한 그의 신학개혁과 제네바 개혁사상은 우리 후대들에게 엄청난 신학적 유산으로 물려준 보화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그러니 잠시나마 "성도의 견인"에 대한 편견은 버리고 “영생”에 관한 본문(요 10:26-28)의 내용을 순수하게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text)의 문맥을 문법적으로(grammatically)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배경(historical context)을 통하여 그 뉘앙스(nuance)를 파악한 후에, 신학적인 이해(theological understanding)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역사적 배경 (Historical Settings)

본문의 콘텍스트(context)를 보면, 역사적으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주의적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유대인들(특히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위 새관점학파(new/fresh perspective school)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율법"(covenantal law)을 받아 지킨다는 선민의식에 매몰되어,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일, 절기들을 지키며, 금식하는 등의 신앙형식에 몰입되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인 의(krivsiς, justice)와 인(e[leo", mercy)과 신(pivstiς, faith)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언약적 율법의 행위는 의미가 없는 신율법주의(neo-nomism)에 불과하다는 뜻이다(마 23:23).

다시 말하면,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으로 율법을 받아 지킨다는 명목으로 율법의 형식에 매몰되어 율법의 핵심인 인(mercy)과 의(justice)와 신(faith)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며(요 10:30), 하나님의 아들이시고(요 5:26), 인자로 메시아이신(요 4:26)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2) 문법적 이해 (Grammatical Understanding)

본문인 요 10:26-28의 문맥(context)을 자세히 살펴보면, 10:26에서 "양의 행동"이 아니라 "양의 신분(소유)"에 관한 말씀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주석하려면, 존재론적 접근(ontological approach)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유대인(바리새인)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그리스도의 양,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ajkouvei), 주님께서 알아주시고(ginwvskw), 주님을 따르는(ajkolouqou'sivn) 사람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의미함이다.

본문에 대한 혹자의 해석 중에 "견고한 영생이 약속된 이들은 '그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은 그 양들을 알고 양들은 주님을 따르는(요10:27) 사람들이다"에서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표면적 유대인인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인 제자들을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의 문법상으로 그의 해석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전도되어 있다. 분명히 말하자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따르는 자들이 영생에 들어갈 주님의 양들이다"라는 문맥의 뉘앙스의 차이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따르는 것"은 주님의 양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양"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의미한다.

물론, "주님의 양"이 분명하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행위"가 따르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니라면,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물론 외식적으로 따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마 23:23; 23:13; 23:15; 23:29; 23:51).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요 10:26). 그런데 여기서 의미상 문법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주님의 양이라"라는 표현과 비교해보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님의 양"은 신분을 의미하고 "따르는 것"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10:26)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뜻이다. 반대로 주님의 양이 아니라면 주님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는 뜻이 된다. "주님의 양이라는 것"(신분: 주님의 소유)이 원인이며, "주님을 따르는 것(행위)은 결과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야고보의 해설과 같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이다. 여기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이 엇갈린다.

칼빈주의에서는 "행함"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것이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믿음"보다 "행함"이 조건적으로 우선이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에서는 텍스트(text)를 우선으로 하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콘텍스트(context)를 우선으로 한다.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여 믿음도 인간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인간이 행함으로 의와 영생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적하시면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요 10:26)라고 했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여 유대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고 제자들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주님의 양"이라는 논리는 비성서적이다. 왜냐하면, (1) 주님을 따르는 행위가 바리새인과 같이 위선일 수도 있기 때문이며, (2) 주님의 양이 아니면 주님을 믿을 수도 따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요 10:26).

"주님의 양"이 원인(cause)이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 결과(effect)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문맥으로 보아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며, 주님을 따르는 행위가 주님의 양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그 행위가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양"(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롬 3:28; 갈 2:16; 3:2-5),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내려주시는 성령의 거듭남(중생)으로 되는 것이다(요 3:5; 3:6; 3:8).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어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중생”(regeneration)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이 행위로 말미암아 주님의 양이 된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독자적인 사역인 성령을 통하여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다. 중생 즉 거듭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성령으로 거듭남(being born again), 즉 중생(regeneration)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벧전 1:23).

(3) 신학적 정리 (Theological Theorem)

혹자의 주장 중에 "견고한 영생이 약속된 이들은 '그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은 그 양들을 알고 양들은 주님을 따르는(요10:27) 사람들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부분의 워딩(wording)인 "견고한 영생이 약속된 이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라는 말은 맞는 표현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워딩은 "영생이 약속된 이들이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곳에서 또 다시 알미니안 사상의 본색으로 돌아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의 양"이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신학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며 주님을 따르는 행위로 인하여 주님의 양이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도 요한의 표현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16)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역으로 "빛은 하나님이시다" 또는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질(archetype)과 현상(type)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중생(regeneration) 또는 칭의(justification)는 존재론적 본질이며, 행위(works)는 본질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이 사랑이라고 해서 아무런 전제도 없이 빛이나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분명한 전제도 없이 하나의 가정(hypothesis)이나 개연성(probability)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잘 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접근방식을 따라 보기로 하자. 그의 주장 중에 "'들으며,' '알고,' '따른다,'는 말씀은 현재형이다. 계속되어지는 일을 말한다. 주님의 음성을 계속적으로 듣고,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주님 편에서의 양에 대한 체험적 앎도 계속되는 것이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적 접근이다. 본문에서 “듣고”(ajkouvei), “알고”(ginwvskw), “따르다”(ajkolouqou'sivn)라는 단어들은 영어로도 물론 현재형이다. 그러나 헬라어에서의 시제(tense)는 영어의 경우와 엄청난 문법적, 그리고 철학적, 신학적 차이가 있다. 영어에 있어서의 현재형은 시간적 의미에서의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고 있는 타임라인(timeline)에서 현 시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헬라어에 있어서 동사의 시제는 동작의 시간(time of action)과 동작의 종류(kind of action)로 구분한다. 헬라어에서는 동작의 시간보다는 동작의 종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경을 읽을 때에 항상 이점에 유의하지 아니하면 혼동하기 쉽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동작의 시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은 직설법에서만 가능하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법(mood)에서는 시간개념이 없이 즉 무시간(timelessness) 개념으로 동작의 종류만이 그 의미를 가진다. 물론 동작의 종류에 따라서 역시 세 가지로 분류한다. 계속되는 동작, 끝난 동작, 단순동작 즉 계속이나 반복하는 동작의 진행이 아니라 동작 자체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 주로 현재의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 본문에 대한 문법적 이해이다.

위에 언급된 본문에서 그가 지적한 대로 헬라어의 “듣고”(ajkouvei), “알고”(ginwvskw), “따르다”(ajkolouqou'sivn)라는 단어들은 현재시제로 동작의 계속이나 반복을 나타내는 직설법 현재동사로서 계속성을 나타내는 것은 맞다. 계속해서 듣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양이라면,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에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을 따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 10:26의 헬라어 원본에 보면, “ajlla; uJmei'" ouj pisteuvete, o{ti oujk ejste; ejk tw'n probavtwn tw'n ejmw'n.(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로 접속사인 “o{ti”(wherefore, for what) 또 다른 역본에서의 “gavr”(for, because)는 원인을 나타내는 조건적인 직설법으로서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동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현재의 계속적인 행동의 의미를 포함함은 물론, 단순히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의미로 "언제나"로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도 된다.

이에 반하여,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은 그의 통로라고 말한다. 엡 2:8에 보면, 헬라어 "th'/ ga;r cavritiv ejste sesw/smevnoi dia; pivstew": kai; tou'to oujk ejx uJmw'n, qeou' to; dw'ron:"(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해서 “은혜로 인하여”(ga;r cavritiv, by grace), 말하자면 은혜가 원인(by)이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dia; pivstew", through faith), 즉 믿음을 통로(through)로 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성경원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원인으로서 원형적인(archetype) 것이며, "믿음"은 현상적인 것(type)으로 그 결과가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은혜는 하나님의 소관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은 이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소관이지만, 이 둘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corelation)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analog)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야고보의 표현대로 믿음의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과 같이 믿음이 없는 행함 역시 죽은 행함이다.

아날로그(analog) 방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먼저이고 행함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즉 믿음이 있는 자만이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digital)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 믿음과 행함이 신비롭게 하나로 연합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표현해서 "믿음을 통한 행위"라고 말해야지, "행위를 통한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뒤가 전도된 것이다. "행위를 통한 믿음"이라고 말할 때에 알미니안주의와 인본주의적인 가톨릭주의(Catholicism)가 된다(Paul Tillich).

헬라어에서 동사의 시제는 상당한 철학적,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옛날부터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시간과 영원의 개념에 차이를 보며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특히 헬라어의 현재시상은 이 시간과 영원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철학과 신학사상들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헬라어에 있어서 "현재"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캘린더적인 역사적 시간개념으로 “크로노스”(χρόνος)와 다른 하나는 시간을 초월한 한 순간(momentum, chance)을 의미하는 “카이로스”(καιρός)로 칼 바르트가 사용했던 역사(historie)와 초 역사(geschichte)의 의미와 유사한 것 같지만, 바르트는 이러한 의미를 오용하여 실존주의(existentialism) 신학사상의로 빗나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는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실존주의의 반복적인 사건개념과 다른 단회적인 사건개념으로 이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의 양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 승화된 영원(eternity)의 성격으로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를 의미한다.

본문의 현재형 동사들은 신학적으로 현재시제와 초현재적 시제를 나타내는 말들로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 표상적으로 말할 때에 본문의 동사들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인 동작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간적 "현재"(presence in time)를 의미하는 동시에, 단회성과 영원성을 의미하는 초시간적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신학적인 전문용어(theological technical term)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께서 단번의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 성취하신 공로로(히 9:12; 9:26; 9:28; 10:2; 10: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내려주시는 믿음의 "은혜"(유 1:3)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는 "중생"(요 3:5; 벧전 1:23)을 의미한다. 이 "단회적인 구원"의 은혜인 중생(regeneration/born again)의 도리를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는 주님에게 중생이란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냐고 영적으로 너무나 무식한 질문을 해서 주님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요3:3-5)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이다. 중생이 절대적 표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대부분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문제들"을 목회현장(ministry field)이나 선교현장(mission field)에서 일어나는 사회학적-선교학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게 되며, 분명한 답변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신자가 자살하면 지옥 갑니까? 아니면 그래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와 같은 질문에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가느냐? 라는 질문은 답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질문인 것만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돈독한 성도들, 심지어 주의 종(목사)들까지도 자살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 난센스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대답은 애매모호한 것 같지만 아주 분명한 단 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회학적, 교육학적, 선교학적 등의 상황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에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 문제는 존재론적인 접근(ontological approach)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정답은 아주 쉽고 매우 간단하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 키워드(key-word)가 곧 "거듭남"(born again) 즉 "중생"(regeneration)이다. 말하자면, 어떤 경우에도 중생한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성품이나 성격 또는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론적 신분의 변화"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구원의 표준이라는 것이 성경원리이기 때문이다(요 3:3-5).

물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중생한 사람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 둘째 아담(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시는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회개가 가능한 자범죄는 범할 수 있어도, 다시는 새롭게 할 수도 없고, 회개가 불가능하며, 다시는 속죄할 제사가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인 원죄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히 6:6; 10:26-27)는 범할 수 없는 새사람의 성품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범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요일 3:9; 5:18).

물론,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동안 육욕에 끌려 순간순간 자범죄(peccatum actuale)는 범할 수 있지만, 이 자범죄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베드로와 같이 결국은 회복하게 되나,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원죄(pecctum originale)와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은 회개가 불가능하여 결국 제 갈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말씀의 원리이다(히 6:6). 그러므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은 회개가 가능하여 사망에 이르지 않았지만, 가륫 유다는 회개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18)로 인하여 제 갈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제이다.


[결론]

1. 본문말씀인 요 10:26-28의 말씀을 기록된 순서대로 배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너희(유대인들)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이는 반대로 너희(제자들)가 내 양이므로 믿는도다"라는 뜻이다.
(2)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3)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 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 이 말씀의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다시 요약해서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희(제자들)는 주님의 양이므로 주님을 믿는다.
(2) 저희(제자들)는 주님의 양이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3) 저희(제자들)에게 영생을 줌으로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점은 본질적인 신분이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고, 주님의 양이니 영생을 주고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완벽한 구원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반복적이며, 계속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이 드리신 주님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단번에 주신 믿음으로 성취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생"이란 중생에 의하여 단번에 완성되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위의 과정(process of works)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가 "구원"의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면에서 "영생의 구원"은 단번에 완성되지만. "성화의 구원"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육신이 죽어야 영적 성화가 완성되며, 부활로 전인적 성화의 완성인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본래 생명의 존재(being of life/being)는 생활의 과정(process of life/becoming)과 다르다.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주장과 달리 생명은 존재론적 출생을 의미하고, 생활의 과정은 생명의 본질적,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생명의 성장(growth of life)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사람이 출생한 갓난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생으로 탄생한 영적 신생아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변화가 없고, 영적으로 지식(knowledge)과 거룩함(holiness)과 영적 능력(spiritual power)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엡 4:13).

본질적으로 우리의 "영생"(eternal life)은 단회적인 영적 출생(요 3:6)을 통하여 완성되는 반면에, "성화"(sanctification)는 반복적인 행위로 성장과정을 통하여 성숙해진다. 영생은 존재론적 본질(ontological essence)이며, 이와 반면에 성화는 현상적으로 발전하는 성숙의 과정을 통한 성도의 인격화(personification)를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이 한 번의 출생으로 완성되는 존재론적 본질이며, 성화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발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신앙의 인격화(personification of faith)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E END

REV. PAUL B. JANG
e-mail: revpauljang@hotmail.com
website: www.mission4.org (한글)
website: www.usmission4.org (영문)
2018-05-08 01: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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